첫 서울 근교 미술관 나들이. 근교라고 하기에 조금은 먼 원주였지만 워낙에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이었다. 마침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클래식&탱고 공연을 한다고 하니 다섯 번째 만남은 여기로 정했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제임스 터렐 상설관, 거기에 늦가을 야외에서 펼쳐지는 공연까지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기대가 되는 만남이었다. 장거리 이동에, 인원도 적지 않아 준비할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서울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오래간만에 찾아온 소풍 같은 설렘이 반갑다. 이곳저곳에서 판교역까지 흔쾌히 달려와준 고마운 7명의 멤버들과 인사한 후, 스타벅스의 새로운 커피에 ‘와 맛있다'를 연발하며 출발.
2시간 동안 비교적 막히지 않게 달려 도착한 곳은 ‘산야초를 찾아서'라는 백숙집. 오크밸리 초입에 식당이 많지 않고 대부분이 한우집인데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은 관계로 분명 맛은 회사 근처에서 먹는 한우 맛인데 값은 절대 싸지 않은.. 배 채우는 식당이겠지 싶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식당으로 결정. 메뉴는 한방 닭백숙과 훈제오리바비큐를 미리 예약했다. 시골 시골 그야말로 꼬불꼬불 길을 지나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공기 좋고 햇살 좋고 단풍이 좋아 이미 ‘맛있을 거야’ 싶다. 깨끗한 내부와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도 좋다. 미리 예약한 메뉴가 나오고 한참을 모두 말없이... 말없이... 흡입의 시간을 가졌다. 닭과 오리 두 마리로는 우리의 허기짐을 채우지 못해…”감자전 하나요. 동동주 하나요. 감자전 또 하나요. 죽을 내어주세요. 국수도 내어주세요. “
백여 장의 사진 중 음식 사진이 딱 두장일 만큼 열심히 먹었다. 그래도 굳이 평가를 하자면, 밑반찬은 기대에 못 미치고-지역 식당에 가면 거기서만 먹는 특별한 밑반찬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에- 메인 요리는 나무랄 데 없다. 약선 동동주라는 것은 직접 담근 술인데 맛은 나쁘지 않으나 메뉴와 그리 어울리진 않는다. 메인 요리에 이미 약재가 들어가 쌉싸름한 맛이 입에 감도는데 반주까지 쌉싸름하니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구수한 막걸리가 더 어울릴 듯.(다른 막걸리 메뉴가 없다.) 많이 바쁜 와중에도 사장님의 친절함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것도 식당 ‘맛'의 일부 아닐까. 미술관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식당들을 주욱 훑어 봤는데.. 아마도 다시 뮤지엄산을 찾는다면 또 이곳에 오지 싶다. 맛있게 배부르고 햇살 내리쬐는데 약간의 취기까지 있으니 기분 업. 취중 관람하러 출발.
한솔뮤지엄이 MUSEUM SAN이다. 마치 리움이 삼성미술관 하지 않고, 본태 미술관이 현대미술관 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아챈 듯 갑자기 이름을 바꾸었다. 바꾼 이름의 어감은 좋으나 아직은 혼동을 준다. 그래서인지 미술관 입구부터, 아니 마케팅에서부터 브랜딩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참 좋다.
뮤지엄산 입구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을 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참 좋아라 하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감동이 있다. 위압적인 높음도 조촐한 낮음도 아닌 적당한 높이의 돌담들이 인상적이다. 건축가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찰방찰방 얕은 물의 정원은 두말할 것 없이 멋지다.
전시 관람을 하며 이 건축물과 공간에 대해 느낀 것 중 가장 감탄했던 두 가지.
첫째. 동선. 여러 개로 나뉜 방을 미로처럼 지나며 관람을 하는데 놀랍게도 가이드도 없고 웨이파인딩 사인이 덕지덕지 있지도 않은데 물 흐르듯 이동이 이루어진다. 많은 미술관에서 아쉬운 것 중 하나가 동선인데, 이곳에서는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너무 자연스러워 뒤늦게 알아챌 만큼 이동에 막힘이 없다.
둘째. 채광. 전시공간은 빛이 차단되어 조명으로 컨트롤하는 구조이지만 각 공간들의 이동마다 빛이 멋지게 들이친다. 높이도 모양도 제각각인데, 인상적인 것이 이 빛으로 인한 그림자들이 만들어 내는 조형미가 공간의 물리적 건축요소들과 어우러져 굉장히 아름답다. 이 그림자의 모양은 매시간 바뀌고 빛은 시시각각 색이 변하니 이 건축은 똑같았던 적이 없을 것만 같다.
모기업이 제지 회사인 이유로 페이퍼 갤러리가 크게 자리했는데, 갤러리라기 보단 박물관이 맞겠다. 이 곳에서는 콘텐츠 보다는-직업병이 강림하여-공간 연출이 흥미로웠다. 종이를 콘셉트로 한 다양한 연출에 보는 재미가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과하지 않고 톤 앤 메너도 물리적 요소(가구, 벽, 작품)들과 썩 잘 어우러지고 있다. 누군가 기업홍보관을 설계한다고 하면 꼭 이곳을 투어 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감동을 뒤로하고 기획전인 [사유로서의 형식_드로잉의 재발견]을 관람했다. 페이퍼 갤러리와는 달리 높은 층고에 밝은 채광이다. 백남준, 박서보, 박수근, 이중섭, 이응노, 구본창 등… 이름만으로도 설레지만 (앞서의 감동이 커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사실 기획전은 조금 아쉽다. 이들의 에스키스 작업을 굉장히 많이 전시해놓았다. 뮤지엄산에는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많아서 다양한 관람의 여정을 즐기게 되는데, 관람객의 모든 여정에서의 경험을 고려한다면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과 제임스 터렐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일지도.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새로운 관람의 경험을 제공해준다는 측면에서 신선하다. 뒤로 기대어 천정을 한참을 응시하고 있으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환기미술관의 로빈 미 나드 작품에서 처럼 장소의 확장에의 경험과 유사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공간과 조명을 이용한 착시가 매우 흥미롭다. 실제 공간에 들어가보면 우리가 보는 공간보다 훨씬 큰 공간에서 조명을 비추고 있어서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는 도슨트의 설명과 관람 규정이다. 작품의 훼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지나치게 관람을 컨트롤한다. “끝에 앉아서 보세요.”,” 자 이제 가운데로 이동해서 보세요",”1분 후에 이동합니다.”.... 패키지 관광 온 듯 가이드를 하니 감동의 여운이 뚝뚝 끊겨 아쉽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저녁 무렵에 해가 저물어 갈 때 즈음 시작된 공연은 늦가을 산바람 추위의 걱정도 잊게 만들 만큼 낭만 열정적이었다. 강원도 어느 산속 안도 타다오의 작품에서 탱고 선율을 듣는 기분은 글로 옮기기 보단 그냥 간직하는 걸로.
쓸 말이 산더미 같아 구구절절 길게도 썼는데, 그냥 Amazing이라고 한마디 쓸까 싶기도 했다. 맑은 산속에서 복잡한 상념을 떨칠 수 있었고 종합 선물세트 같은 예술의 경험으로 행복함을 채울 수 있었다. 이제 추워지는 겨울엔 또 어떤 만남을 가져볼까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