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고,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중학교 시절, 자고 일어나면 늘 무릎이 간질간질하곤 했다. 그땐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무릎을 가만 보니 살이 터져 가로로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고 어느새 키가 26cm 자라 있었다. 그 이후로 그때처럼 키가 급격히 자란 적은 없었지만 간혹 아침에 무릎이 간질간질할 때면 키가 크고 있구나 생각하곤 했다. 기분이 썩 좋았다. 자란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기쁨이었다.
어린 시절에 장래희망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대통령, 과학자, 판사, 의사, 선생님... 뭐 그런 것들. 장래희망을 적어오라는 숙제는 늘 부모님 몫이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5지선다형쯤 되는 객관식 문제를 찍어 답을 적곤 하셨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장래희망이 주관식으로 바뀌었다. 부모님을 거치지 않고 투박한 내 손으로 적어낸 그것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콩닥콩닥했다.
그 이후로, 꿈을 기록하는 일은 내게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졌다. 군 복무 시절, '강의 하기'라는 무모한(?) 꿈을 적었다. 비루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나는 대학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이른바 '내놓은 자식'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고려했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여러 가지 적었던 것 같다. 10여 년이 흘러 이삿짐 정리를 하다 발견한 다이어리에서 그 꿈을 봤을 때,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꿈을 적는 일은 무릎에 줄이 죽죽 그어지는 일처럼 성장을 확인하는 기쁨을 주었다.
창업 후에는 진지한 마음으로 세상 큰 꿈을 적었다. 그 카드를 누군가 봤다면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꿈 카드는 늘 내 가방에 고이 들어있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말이다. 꿈을 처음 적을 때는 마치 이게 내 인생의 업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사실 꿈은 내 손의 핸드폰 마냥 주기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바뀌어도 꿈의 방향은 같다. 마치 내가 아이폰 3G부터 6S까지 쓰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변하는데 아무렴. 누군가 '넌 왜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니?'라고 물으면 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으니까요'라고 대답할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꿈을 기록한 지 4년이 흘렀고 꿈에 대한 성찰, 그로 인한 변화가 필요했다. 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단지 발 앞의 돌부리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길로 다른 방법으로 걸어가야 함을 깨달았고 꿈 여행을 떠났다. "멀리서 보고 멀리 보는 일"을 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10가지를 적었고 지금 나는 새로운 곳에서 아래 10가지를 실천하며 살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1. 맑은 공기
살면서 공기가 중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기는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지금까지는 늘 부족함도 불편함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공기는 이제 친절하지 않다. 마스크를 끼고 창문을 닫고 외출을 줄이는 일에 하루 종일 신경 쓰고 있다면 주변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냐?" 그 유난을 떨지 않으면 단지 목이 칼칼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미 몇 차례의 일어나선 안 되는 사고들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4월 한 달간 외출 가능한 날이 단 이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절대 제대로 알려주지 않지만-마라톤 대회는 열렸을 것이고 한강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넘쳐났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소중함을 모르는 것, 그리고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 남들에게 유난스러워 보일까 눈치보는 것. 임계점을 넘어선 지금 남들이 다 마스크를 쓸 때가 되면, 가라앉는 배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제 (맑은) 공기는 내가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고, 나는 이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2. 건강한 음식
두 가지 이유로 음식을 먹는다. 생존과 쾌락.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할 정도의 환경과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대게 쾌락을 위한 음식 섭취를 해왔다. 라면을 먹어도 즐겁고 샐러드를 먹어도 즐거울 수 있으나 이제 라면을 먹는 일이 생존과 직결된 일이 되어 버렸다. 미세먼지는 창밖에 있지만 GMO는 우리집 밥상에 있다. 못 먹어서 굶어 죽던 시대를 살던 부모님의 이야기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었지만, 잘 먹어도 죽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나를 더 동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일은 단지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고 싶기 때문이다. 맑은 공기처럼 유난을 떨어서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일을 나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3. 예술
예술은 내 삶의 밸런스를 맞춰주고 영감을 준다. 가끔 우주에 떠있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눈앞의 문제들을 먼지처럼 작게 만든 후 진짜 중요한 본질을 가려내는데 좋은 방법이다. 미술관은 내게 우주공간과도 같다. 예술은 지금 중요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눈앞에 있어 커 보이는 착시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며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게 한다. 일상의 밸런스를 회복케 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또한 예술은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내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을 보게 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내 삶과 업의 크나큰 영감이 되어 준다. 나는 예술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4. 독서
예술과 마찬가지로 책은 능동적 생각 도구이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일은 나의 집중력을 온전히 그것에 쏟도록 한다. 누군가의 가장 깊은 생각을 가장 쉽게 들여다보는 일, 그것에 집중하는 일은 나의 편협한 사고과 지적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는 일과 같다. 평생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삶에 있어 책은 위대한 스승이 되어줄 것이고, 나는 그런 책과 늘 함께 하는 삶을 살 것이다.
5. 운동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서 하면 건강해지는 것이 운동이다. 마치 훌륭한 기업가가 말하길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라고 하는 것처럼...다행히 어릴 적부터 가장 꾸준히 재밌게 해오고 있는 일이 운동이라 지금처럼 아니 어쩌면 조금은 더 철저하게 그 즐거움을 느끼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6. 글쓰기
말과 글은 나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리더라면 더욱 그것에 능해야 함을 매일매일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글 쓰는 연습은 백가지 생각 서랍을 만드는 일이고 매일 일어나는 일의 중요한 사건을 가공(사유)하여 그곳에 잘 넣어두는 일이다. 이렇게 잘 정돈된 생각 서랍은 타인과 대화할 때 편하게 꺼내서 사용할 수도 있고 나의 일관된 행동을 보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글 쓰는 일은 명상과도 같아서 복잡한 세상이 가장 차분해지는 안개 낀 새벽녘과 같다. 고요함. 글을 쓰는 고요함을 즐기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7. 대화
생각이 곧 말이 된다. 생각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들이는 것만큼 그것을 표현해 내는 일에 노력을 해야만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살아가는 동안 덩쿨마냥 엉켜 쑥쑥 자라날 것이며, 모든 문제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해결책은 또한 사람에게 있다. 그동안의 일의 경험에서 가장 큰 배움은 대화의 중요성이었다.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뒤엉켜 살아감에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화는 가장 중요한 도구일 것이다. 건강한 대화의 기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8. 사회적 가치 생산
세상을 바꿔보겠노라 5년을 달려왔다. 어떤 문제를 찾아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일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나를 움직이는 큰 동인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동안의 방법과 다른 것이 있다면 지속가능한 문제해결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를 묵직하게 이뤄나가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해 볼 것이다.
9. 여행
개인적인 이유로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한 나의 20대, 창업을 할 때 소소한 꿈을 꿨다. 해외 출장. 다행히도 그 꿈은 이루어져서 여행 같은 출장을 종종 떠날 수 있었다. 평생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뿐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가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여행에 대한 동경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의 유무가 아니라 가치의 우선순위이다. 내게 중요한 삶의 가치라면 가진 돈과 남은 시간으로도 여행을 갈 것이고 또한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시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바라마지 않는 여행이 목적인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에 여행을 올려두니 그렇게 되게 할 것이다.
10. 사랑하는 사람
내가 워커홀릭처럼 보였는지 친구가 물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거 한 가지만 꼽으라면 뭐니?" 나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여느 가정처럼 어느 날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우리 떠나자!"라고 뜬금없이 말한다면, 머릿속에는 수많은 허들이 스치며-이 과정조차 나중엔 생략되겠지만-헛헛한 웃음만 짓고 말 것이다. 인생 선배가 "결혼해봐라, 애 낳아봐라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라고 시니컬하게 조언한다면 나는 반문할 수 있다. 결혼하기 전에, 애 낳기 전에 망상과 동경 말고 실제 어떤 준비를 했는지 말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며 실천하는 위 9가지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줄 것이다. 70억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이 기록이 흔적으로 남아 후에 또 다시 성장의 기쁨을 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할 때, 절대 주저하지 못하게 속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정하고, 그냥 그렇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