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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iam Jan 26. 2023

초등학교 선생님 그만두고 세계여행

그라나다 : 알함브라 궁전과 무늬

성 니콜라 전망대에서 바라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은 고아한 거목이 유구히 내린 뿌리처럼 거리 곳곳을 지배하며 뻗어 있었다. 나무 하나가 숲을 이룬 듯 도시 어디서든 알함브라를 느낄 수 있었다. 뿌리에서 돋아난 듯 늘어선 집들은 알함브라의 정기를 빨아들인 뒤 도시로 내뱉으며 살아가는 생명 같았다. 그라나다는 고풍스러운 갈색이 정숙한 도시였다. 그라나다는 그간 다녀본 곳 중에서 고적의 기품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정오를 조금 넘어 도착한 동네는 고즈넉했다. 세비야 호스텔에서 이탈리안 가이 때문에 고생했던가. 그라나다 호스텔은 차분했다. 신축인 호스텔에는 개인 샤워실이 룸 안에 딸려 있었고, 라운지는 깨끗하고 아늑했다. 속절없이 떠나오느라, 이렇다 할 정보 없이 찾았는데 운이 좋았다.

깔끔했던 그라나다 호스텔


 객실에 아무도 없었다. 짐을 풀지 않고 편히 침대에 누웠다. 그간 바지런히 다닌 탓에 나 모르게 여독이 다소 쌓였나 보다. 다리가 저릿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적요했다. 나 혼자 오롯이 공간을 차지한 적이 언제였더라. 슬며시 긴장이 풀렸다.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한 달 동안, 파리부터 그라나다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생면부지 낯선 이들도 많이 만났다. 나쁜 사람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나쁜 사람은 밍밍한 뭇국에 넣는 한 꼬집 소금처럼, 여행이 무슴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내 곁에 나타났다. 나는 운이 좋았다. 서투른 영어는 다소 아쉬웠다. 좋은 사람을 만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했다. 다만 말이 줄수록, 잡설은 줄어 좋았다. 적게 말한 만큼 많이 듣고 보았다. 한 달이 빼곡해서, 꼭 일 년 같았다.


 지난 일을 간섭 없이 유영하다 보니 열꽃처럼 번졌던 피로가 다소 가라앉았다. 이제 그라나다를 걸을 차례다. 성 니콜라 전망대에 오르면 알함브라 궁전을 조망할 수 있다. 짐을 한 편에 정리해두고 사진기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하교를 하는 건지,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지 일렬로 하행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플라멩코를 추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공연자들을 만나면 멈춰서 구경을 했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사지 않을 물건들도 구경했다. 마그네틱 몇 개를 집었다 도로 두었다. 이집트 남부를 가든, 네팔에 가까운 북인도를 가든 마그네틱으로 만든 기념품은 꼭 있었다. 나는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쓸모없는 것들로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세상에 자석 공장이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자석처럼 얼마큼은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나 역시 망하지는 않을 테다.

성 니콜라 전망대 가는 길


 오르는 길이 가팔라서 가슴이 억세게 뛰었다. 그래도 두 다리 또렷이 잘 걸을 수 있어 감사했다. 미루고, 미루다 혹시라도 걷기 힘들어졌다면, 그로 인해 여행을 포기해야 했다면 얼마나 속상했을까. 하릴없이 마음을 절었던 때도 있었지만 몸은 그만큼 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삶이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는데, 우선은 몸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몸이 지지하면 마음은 얼마간 더 버틸 수 있다. 다소 힘이 들었지만, 성 니콜라 전망대에 오르자 알함브라 궁전의 정경을 방해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만년설은 그 뒤편에서 풍경의 정취를 더했다. 궁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땀에 젖은 코트를 벗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곱게 맞았다. 연연히 이어지는 맥박에 기분 좋았다. 가슴이 뛸 때 같이 터진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알함브라의 풍경이 얼마큼 기억에 미화된 것 같다. 아름다웠다.

성 니콜라 성당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 뒷편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어울러짐이 아름다웠다.

 성 니콜라 전망대 하늘 위로 젖어드는 노을은 더욱 보기가 좋다는데,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리기가 슬 지루했다. 엉덩이를 털고 오른 길의 반대로 내려 걸었다. 가는 길에 한 가족이 세그웨이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재밌게 사는 가족이다. 우리 아버지도 저 오토모빌을 타자고 하면 탈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우리 아버지만 그러실 것 같지는 않고, 이제는 옛날이 되어버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체로 비슷하게 반응하실 것 같다. 당신들께서는 좋아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들에 적응해서 살아오신 분들이다. 편히 지내면 왠지 불편해서 자꾸 뭐라도 찾아서 하시려는 분들. 취향이란 그저 가족들이랑 삼겹살을 구워 먹거나, 집에 와서 소주 한 병이 전부인 분들. 그런 분들에게는 몇 만 원씩 값을 지불해야 하는 세그웨이 같은 장난감은 사치 그 자체가 아닐까. 멀리 가족 여행을 가서도 궁색함을 벗지 못하던 부모님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라나다에서 세그웨이를 타던 가족들

 시내로 내려와서 마트에 들렀다. 마침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염가에 팔길래 신나서 계산을 했다. 호스텔로 돌아와 팬에 노릇-하게 구웠다. 어찌나 맛있던지. 이베리코는 역시 이베리아 본토에서 먹어야 제맛이구나. 맥주도 술술 넘어갔다. 잠을 잘 잤다.

알함브라 궁전 알카사바와 카를로스 5세 궁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선 이슬람 유적을 쉽게 볼 수 있다. 711년 이슬람 우마이아 왕조가 침입한 이후로 약 800년 동안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알카사르나,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같은 건축물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슬람 문화의 흔적들이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나스르 왕조가 1238년 건축을 시작했다. 알함브라 궁전을 지을 당시에는 ‘레콩키스타’라고 불리는 기독교 세력의 영토 복원 운동 때문에, 이미 이슬람 세력이 대부분 축출된 상태였다. 도처에 드리우는 망국의 그림자와 싸워야 했던 그들의 간절함을 생각해보니, 알함브라 궁전을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적으로 손꼽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코 사라지게 둘 수 없던 그들의 이상과 규칙을 고이 담았으리라.


 알함브라 궁전에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지만, 그중 백미는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나스르 궁전이다. 나스르 왕족이 살았다는 궁전에는 건물 전체에 코란을 담은 글자와 기하학적 무늬를 빼곡하게 새겨두었다. 무늬는 욕구의 흔적이다. 사람들이 동사로서 욕구를 표출하며 세계를 구축하는 동안 무늬가 흔적으로 남는다. 무한히 반복되는 그들의 무늬는 일정한 규칙이었고 예외는 없었다. 그림이나, 석상이 없는 이슬람 문양을 보면서 내가 그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우리는 섞일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나도 이교도일 뿐일까.

나스르 궁전. 기하학 무늬 ,정원, 12사자상


 그리고 내가 남겼을 무늬를 생각했다. 엄마의 얼굴에 내가 새긴 표정과, 학교에서 일할 때 아이들의 마음에 남긴 무늬. 그리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들과 서로 새겨둔 무늬. 그것은 정말 내가 새기고 싶은 무늬였던가. 내가 엄마에게 소리치면서 남기고 싶던 것이 정말 그 표정이었던가. 나는 고작 그런 것들을 원했던가. 그럴리가 없었는데, 바라지 않고 남긴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싶었다. 내가 내 무늬를 지우고 싶은 만큼 예외 없이 반복하면서 남긴 무어인들의 무늬가 경이로웠다.


 한편 종종 어떤 무늬는 오래 남아서, 거부할 수 없는 질서가 된다. 언젠가 인생은 부모나 잘 만나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학교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서는 무너니고 말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부모 아닌 이들과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고작 인생을 부모나 잘만나면 끝이라고 취급하기엔 세상에는 여백이 너무 많았다. 너무 단단하게 새겨져서 지울 수 없다면, 여백을 찾아 새로 새기면 된다. ‘-’에 획 하나를 더하면 ‘+’기가 된다는 진리는 절대로 유치하지 않을 뿐더러, —————————————> 이렇게 화살표로 바꿀 수도 있다. 새로운 이정표로 바꿔 삼으면 다른 무늬들도 얼마든지 바꿔나갈 수 있다. 우리 부모의 무늬마저도.



 그라나다의 마지막 주인 무함마드 12세 보압딜 왕은 조여오는 스페인의 영토 회복 운동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스페인의 군주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축출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으면서 그는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게 슬프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가 그리워했던 것은 궁전 자체가 아니라 알함브라 궁전에 새겨놓은 그들의 무늬일 것이다. 사랑했던 이들과 손을 잡고 걷던 무늬, 매일 저녁 식사에 나누던 이야기의 무늬, 옳고 그름에 대한 그들의 무늬와, 그것으로 뻗어야할 세계의 무늬였을 것이다. 결국 보압딜 왕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알함브라 궁전과 비슷한 궁전을 지어 산다. 알함브라의 무늬와는 다른 무늬였겠지.


 나스르 왕조를 몰아낸 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5세는 이교도의 궁전에서 살 수 없다며, 알함브라의 남아 있는 지난 무늬를 지우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운 궁전을 지어 그들의 무늬를 남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마저도 사라졌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던데,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질서는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는 진리다. 나의 무늬도 사라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늬를 남긴다. 덧없기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카를로스 5세 궁전
헤네랄레페, 알카사바, 알바이신 지구
헤네랄레페 가는 길, 아름다운 숲 / 나스르 궁전
나스르 궁전에서 본 뷰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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