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기억
2016년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라입니다.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84잔, 매일 한 잔 이상 커피를 마시고 전국에 5만 개가 넘는 커피전문점이 있는 나라, 대한민국 커피산업의 현재 모습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요?
최초의 커피를 마신 기록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월(Percival Lowell, 1855.3.13-1916.11.12)은 그의 저서 『Choső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보면 그는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조선 고위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별장으로 유람을 가게 되었는데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우리는 다시 누대 위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 We mounted again to the House of the Sleeping Waves to sip that latest nouveautē in Korea, after-dinner coffee.”라는 기록을 남겼다.
유럽에서 커피 문화가 만연하고 커피가 제국주의의 진출 경로를 따라 세계 곳곳에 퍼져나간 지 오래인 1876년,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비로소 바깥세상에 문을 열게 된다. 1882년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게 되어 세계의 열강들은 앞 다투어 조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선교사를 비롯해 단순한 여행객에서부터 외교관,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사회 전 분야에 걸친 이들과의 활발한 교류는 적지 않은 기록물을 남기게 되었다.
[출처][한국 커피의 역사] 조선, 커피를 탐하다. 닥터와 왈츠만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초의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서울 최초의 커피숍 " 손탁 호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까지 얼어붙는 차가운 겨울 새벽" 초라한 궁녀용 교자(가마)에 몸을 의지한 고종은 변변한 호위도 없이 세자(순종)와 함께 황급히 경복궁의 영추문을 빠져나간다. - 고종 순종실록 中-
1896년(건양 1년) 2월 11일.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궁을 비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됩니다. 세계사를 통틀어 단일 왕조로 최장수하였던 이씨 조선왕조의 실직적인 마침표를 찍는 사건인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속하게도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가 이러한 비극의 역사 속에서 시작됩니다.
러시아 공사관의 생활을 통해 고종은 커피 애호가가 됩니다. 이후 궁으로 돌아온 이후 고종은 덕수궁 내의 동북쪽 경치 좋은 곳에 "정관헌"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관을 짓게 합니다.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로마네스크풍의 건물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이곳에서 고종은 대신들과 함께 서양 고전음악을 들으며 커피와 다과를 즐겼다고 합니다.
[정관헌의 현재 모습과 1973년도의 모습]
하지만 왕이 직접 짓게 했고 일반 국민들은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곳으로 일반 사람들에게도 개방된 곳은 아니기에 최초의 커피 전문점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188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종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때 가깝게 지낸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라는 독일계 러시아 여인입니다.
1885년 10월,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가 서울로 부임되어 올 때 함께 왔습니다. 베베르의 소개로 구한말의 궁중에 뛰어든 그녀는 타고난 처세술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며 (아관파천 시에는 고종의 음식과 개인용품 등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 받게 됩니다. 이 건물은 외교관들의 사교와 로비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특히 미국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반일 성향의 외교관 사교 클럽인 "정동 구락부"의 집회 장소로 사용됩니다. 이곳은 당시 극동 아시아 외교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손탁에게 감사의 뜻으로 이 건물을 헐어내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주었는데 이곳이 바로 손탁 호텔입니다. 이 호텔의 1층에 "정동 구락부"라고 불려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전문점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커피 문화는 이렇게 고종황제에 의해 호텔 내 커피숍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02년 정동 29번지에 2층의 러시아식 건물인 손탁 호텔이 개업합니다. 이곳은 나라 안팎의 상황에 의해 자연스럽게 국내외 유력 인사들의 정치와 외교의 주무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반일 성향의 외교관 사교 클럽인 "정동 구락부"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손탁은 명성황후의 신임 아래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역할을 돕게 됩니다. 정동 구락부를 모체로 한 ‘독립협회’가 발족한 뒤 독립관을 건립하기까지 주요 인사들이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모색하기도 했었습니다.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와 커피의 연결고리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독립국으로 갖춰할 기본적인 주권들을 줄줄이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통한의 대일항쟁기(일제 강점기) 시대가 시작됩니다. 대일항쟁기의 역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36년간 이어집니다.
손탁호텔은 1904년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패하면서 세력이 약해져 한일병합조약 이전인 1909년 보에르에게 매각했고 보에르는 1917년에 이를 이화학당에 매각했으며 이화학당은 이를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 타계한 프라이 선생을 기념하는 프라이 홀로 신축했으나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용모가 아름답고 태도가 세련되었으며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나며 외국어에 능통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얻었던 손탁 여사, 이 파란 눈의 외국인 여성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도와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험한 시대에 무엇이 이 여인을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가게 했을 까요? 하지만 그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고 일본의 강점기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손탁 여사의 업적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역사 속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커피 이야기를 역사와 연결 지어 풀어내려고 하니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전문점도 1988년 인천의 대불호텔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손탁호텔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고종황제의 커피이야기를 최초의 커피로 알리려고 했고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고 자료를 찾다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를 다시 마주하게 되어 이 이야기에 분명 숨은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관파천을 겪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접하게 되었고 애호가가 되어 최초의 커피인으로 만든 이 거짓 스토리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자락을 커피와 함께 기억하게 했다는 것은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선조들이 목숨 걸고 치열하게 나라를 되찾아내고 지켜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도 물어봅니다. 매일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잠시라도 여유가 있다면 후손들이 살아갈 나라를 위해 살아가신 선조들을 떠올리며 기억하는 시간을 한 번쯤 갖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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