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화 고통 그리고 기회.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과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 이 두 가지만으로도 관속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찬혁은 익산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후회하고 말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급여를 많이 준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사출기계는 네 대 밖에 되지 않았지만 트럭에 들어가는 커다란 범퍼를 만들었기에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레진을 녹여서 뿜어내는 노즐 역시 대포처럼 엄청난 크기였다. 노즐 온도도 기본적으로 300도가 넘었기에 공장 내부에 여름철 실내 온도는 항상 40도 이상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도 수 초 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이마에 맺힌 땀이 상의를 적셨고 바지를 타고 내려와서 양말에 가득 고였다. 찬혁은 기명이가 왜 힘들 것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아무리 열악한 근무 환경이라 할지라도, 가장 견디기 힘들고 이직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대인관계다. 아무리 일이 고되다 하더라도 대인관계가 원만하다면 스트레스는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찬혁이 아무리 좋은 태도로 접근하려 해도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거리를 두는 상황이기에 쉽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텃새가 이곳에도 존재했다. 찬혁의 선임인 김 반장은 찬혁보다 두 살 적은 나이였기에 반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자신은 그때뿐이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는 등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대로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금형은 다 찾아놨어요?”
“네. 그런데 3번은 어디 있는지 못 찾겠습니다.”
김 반장은 찬혁의 얼굴을 한번 슥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짜증을 냈다.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돼요? 3번은 크기가 달라서 따로 빼놓았다고 했잖아요. 이리 와 봐요!”
김 반장은 마치 거대한 테트리스 블록 같은 금형 위를 성큼성큼 내디디며 걸어갔다. 그러나 찬혁은 커다란 금형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에 쫓아가는 발걸음 속도도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 역시 김 반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 참, 빨리 좀 와요! 그래가지고 밥은 먹고살겠어요?”
“죄송합니다.”
김 반장은 자신이 찾던 금형 앞에 다다르자, 금형 옆면에 거의 지워져서 보일 듯 말 듯 한 글씨를 가리켰다.
“자! 여기 있잖아요! 입사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거 가지고 매번 말해야 되냐고요. 내가 다른 일을 못하잖아. 다른 일을!”
“죄송합니다. 기억할 수 있게 따로 표시해 놓겠습니다.”
찬혁은 화이트 보드 마카를 꺼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적었다. 그러고는 작업해야 할 금형 위치를 전부 확인하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서 커다란 선풍기 앞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러자 금형을 교체하던 김 반장이 못마땅한 듯 힐끗 쳐다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네? 도와드려요?”
“그런 걸 일일이 말해야 하나, 보면 몰라요? 답답하네 정말.”
찬혁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어제는 귀찮으니 말하기 전에 도와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참내. 지금은 혼자 힘들게 하는 상황이잖아요! 눈치가 그렇게 없나.”
찬혁은 어이가 없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답답했다. 찬혁이 마지못해서 도와주러 다가가자 김 반장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됐고, 건너편에 가서 내가 말하면 냉각호스나 연결해요.”
“네.”
찬혁은 맥이 빠졌다. 모든 기분을 눈치껏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자신이 마치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정말 일머리도 없고, 눈치까지 없는 무능력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곳곳에 위험한 공간이 많았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해도 부족한 사출공장은, 잠깐 한눈이라도 팔다간 대형 사고가 나기 쉬웠다. 결국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냉각호스의 위치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냉각수가 역류하여 금형으로 분출하고 말았다.
“뭐야! 뭘 건드린 거야?”
김 반장이 놀라서 부리나케 찬혁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상황을 확인한 김반장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어이없는 두 가지 표정이 함께 나타났다. 찬혁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 채 허둥지둥하자 다시 김 반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노즐부터 빨리 잠궈요!"
찬혁이 기계 위에서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바닥에 고여있던 기름과 물 때문에 미끄러지며 뒤로 엉덩방아를 세게 찧고 말았다. 허리가 너무 아팠지만 엄살부릴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노즐을 잠갔지만 이미 금형 전체가 물에 젖어버린 후였다. 금형은 습기에 취약해서 보관할 때도 방청제(금형의 녹을 방지하는 코팅제)를 뿌려서 녹을 방지하며 애지중지하는데, 오히려 물을 흠뻑 뿌려놨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뭘 넋을 놓고 보고 있어요! 어서 에어건으로 습기 제거하고 방청제 뿌려놔요!”
거대한 금형은 그 열린 사이로 들어가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찬혁은 작업을 하기 위해서 이곳을 들어갈 때면 소름이 돋곤 했다. 그 이유는 만일 누구라도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있는 줄 모르고 잘못해서 금형을 닫아 버리면, 자신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끔찍한 압사사고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찬혁은 금형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간신히 물기를 제거한 후 금형 전체에 방청제를 뿌렸다. 초록색 액체가 분사되는 방청제는 스프레이 형태로, 마스크도 없이 작업을 하면 사방으로 비산 되기 때문에 눈도 따갑고 혀뿌리까지 쓴맛이 이 오래 남을 정도로 독성이 강했다. 찬혁이 작업을 마치고 휴지를 돌돌 말아서 콧구멍을 훑어내자 진한 초록색의 방청제가 잔뜩 묻어 나왔다. 콧속에 묻은 것 빼고는 나머지는 전부 폐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박 계장님 담배 한 대 합시다.”
김 반장이 공장 뒷편에 있는 흡연 장소로 걸어갔다. 찬혁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눈이 충혈됐다. 눈으로 들어간 담배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 원인은 방청제 때문이었다. 담배연기를 뱉어내자 담배 맛 보다 방청제의 쓴맛이 혀 뿌리에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돼서 그러려니 이해는 해요. 그렇더라도 작업 속도가 너무 느려요. 박 계장님 경력자로 들어왔잖아요.”
“네..”
김 반장이 뻑뻑대며 담배연기를 연신 뿜어내며 말했다.
“그러면 눈치껏 어느 정도 해줘야지, 이런 식으로 일하면 나랑 같이 오래 못해요.”
“.....”
“저 금형이 얼마짜린 줄 알아요? 아무리 싸도 몇 천만 원씩 해요. 억대가 넘어가는 것도 있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습기 때문에 코어(고온으로 용융된 원료가 금형 안에서 냉각과정을 거치며,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내는 핵심적인 금형 부속/형틀)가 녹슬어서 작업 못하면 납기도 늦어지고 회사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요.”
“죄송합니다.”
“이게 사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
김 반장은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며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게다가 아까처럼 넋 놓고 일하면 큰일 나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박 계장님 금형에 깔리거나 끼어서 죽는 거 못 봤죠?”
“네..”
“정신 차리고 일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요.”
“조심하겠습니다.”
찬혁의 입안은 물기가 없이 바싹 말라갔다. 게다가 혀뿌리에는 휘발유 같은 방청제 냄새와 함께 여전히 쓴맛이 나고 있었다. 김 반장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찬혁을 흘깃 쳐다봤다.
“그리고.. 이건 내가 귀띔을 해주는 건데, 아무한테나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내 귀에 다 들어옵니다. 아시겠어요?”
“저, 저는 다른 사람한테 어떤 말도..”
김 반장은 찬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산모퉁이에 자리 잡은 공장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찬혁은 은미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해안 고속도로 위에는 양 방향으로 분주히 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순간 그 차들이 부러웠다. 당장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서 부천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저녁 7시경.
작업 교대를 위해서 야간조가 들어왔다. 대부분의 중소기업 공장이 그렇듯이 전부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이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조국을 떠나 머나먼 이곳까지 왔다. 게다가 하고많은 일자리 중에서 하필 이곳이라니. 찬혁은 그들을 보면서 대단한 용기에 감탄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과 더불어 동지의식마저 들었다. 그때 출입문 앞에서 외국인 근로자들과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하던 김 반장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찬혁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야간조 중에서 한 명이 늦게 나온다고 하네. 그 친구 올때까지 두 시간 정도만 기계 좀 잡아주세요.”
“두 시간요?”
“왜요, 싫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2호기 잡으면 되는데 2호기 제품은 사상을(금형안에서 냉각을 거친 제품의 테두리나 구멍에 붙은 Burr 등을 칼이나 도구를 사용하여 제거하는 작업)해본 적 없죠?”
“네. 안 해봐서 불량이 많이 나올 텐데요.”
“냉각 시간을 좀 길게 잡아 줄 테니까 해봐요. 불량 나오면 옆에 빼두고. 그렇다고 불량을 많이 빼면 안 돼요!”
김 반장은 막무가내였다. 부탁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2호기는 제품 자체가 크고 작업성이 난해했다. 숙련된 작업자가 아니면 불량품도 많이 발생하고, 그만큼 물량을 뽑기도 힘든 제품이 생산되는 기계였다.
“자, 잘 봐요.”
김 반장은 컨베이어 벨트로 실려 오는 제품 하나를 받아들고서 숙련된 조교처럼 능숙하게 사상을 해 나갔다. 2호기에서 나오는 제품은 PP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데, 열을 받은 상태에서는 비교적 말랑말랑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서 사상 작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자! 해봐요.”
찬혁은 어쩔 수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온 제품을 받아들었다. 목장갑을 두 개나 낀 상태였지만, 제품의 열기는 그 두께를 뚫고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뜨거움에 놀라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상을 시작하자 김 반장이 짜증을 냈다.
“아니, 그렇게 하면 금방 식어서 더 힘들다구요. 그리고 그런 자세로 하면 십분도 못 가서 허리 아파서 못해요. 놔 봐요!”
김 반장은 찬혁이 쥐고 있던 커터 칼을 뺐어 들다시피 가로채고는 다시 시범을 보여줬다. 제품을 끌어안은 채 슥 슥 자연스럽게 작업했다. 연이은 질책에 찬혁은 더욱 의기소침해지며 자신감이 없어졌다.
“자, 다시!”
찬혁은 시키는 대로 뜨거운 제품을 끌어안고 손을 재빨리 움직이자, 어느 정도 작업은 이루어졌지만 사상된 면이 고르지 못했다. 게다가 다음 작업할 제품이 이미 두 개나 내려와서 밀려 있었다.
“아, 이렇게 손이 느려서 어떡해요. 큰일이네.”
두 사람은 이렇게 30여 분 동안을 제품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찬혁도 어느 정도 손에 익어서 속도도 붙었고 제품 상태도 양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찬혁의 손이 이었다. 손에 감각이 이상해서 장갑을 벗어보니 오른쪽 손 마디마디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남자 손이 이렇게 물러서 어디다 써먹어. 괜찮아요! 좀 지나면 굳은살이 붙을 거예요. 자 그럼 수고하시고.”
김 반장은 그 한 마디만 내뱉고 그렇게 숙소로 돌아갔다. 찬혁은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아차 싶은 생각에 컨베이어를 돌아봤다. 이미 제품은 내려와 있었고 그 뒤를 이어서 다음 제품도 내려오고 있었다. 찬혁은 퉁퉁 부어버린 손바닥을 장갑에 간신히 끼어 넣고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물집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작업을 이어나갔다. 힘을 주면 줄수록 물집이 밀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적어도 한 시간 반 동안은 더 버텨야 했다. 그 때문에 세 개의 제품 중에 한 개는 불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이제는 손바닥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드디어 교대시간이 되어 근무 교대자에게 작업에 대한 내용을 인수인계해 주고 장갑을 벗겨내자 축축한 장갑 속에서 엉망이 된 손바닥이 나왔다. 한 쪽 면은 커다란 물집이 자리 잡았고 다른 절반은 물집이 벗겨져서 벌건 속살이 보였다.
고통도 안 느껴졌다. 그보다 이 상태로 다음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또다시 아프다는 핑계로 김 반장에게 야단을 맞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찬혁은 누더기처럼 엉망이 된 손과, 소금에 절여진 단무지 같은 몸을 이끌고 공장 밖으로 나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숙소로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주변에는 공장 입구를 밝혀주는 가로등 하나만 서 있었다. 찬혁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서 가로등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가로등 불빛에 모여든 벌레들이 자신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찬혁에게로 내려와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찬혁은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벌레들과 다투고 있었다. 그렇게 손사래를 치는 찬혁의 눈에 회사 입구에 서있는 기명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기명이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찬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이 시간에 웬일이야?”
기명이가 찬혁이 앉아있는 가로등 아래로 걸어왔다.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는 어떻게...”
그 순간 찬혁의 머릿속에 기명이의 존재가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니가 지금, 진짜..”
“자, 손 이리 줘봐.”
기명이가 찬혁의 손바닥을 자신의 손에 올려놓은 채 바라보았다. 물집 때문에 퉁퉁 붓고 살갗이 벗겨진 손을 바라보던 기명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찬혁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찬혁은 손에 뜨거운 물이 닿은 듯한 고통 때문에 놀라서 재빨리 손을 뺐다.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그리고, 여긴 왜 나타난 거야?”
“이 사람이, 그래도 친구인데 왜라니. 좀 늦은 시간이지만 잠깐 소주나 한잔하자.”
“지랄, 무슨 천사가 술까지 먹고...”
기명이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
“그러게, 나도 너 때문에 인간이 다 된 것 같다. 시간 없으니까 어서 가자.”
기명이의 재촉이 못마땅했지만, 사실 찬혁도 술 생각이 간절했기에 못이기는 척 기명이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가로등을 벗어나자 분이 풀린 날벌레들이 다시 가로등 불빛을 향해서 다시 올라갔다.
“야! 술 한잔하자면서 고작 데리고 온 게, 니 차 안이냐?”
“이 사람이! 여기가 어때서. 그리고, 이 산골에서 술집도 없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잔말 말고 한잔 따라봐.”
찬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어, 어, 이거 뭐야?”
“이 사람이! 그 정도 가지고 놀라긴..”
찬혁의 손바닥이 상처도 없이 말끔해진 것이었다.
“내일 당장 일할 생각으로 걱정이 많은 것 같아서 내가 잔 재주 좀 부려봤다. 맘에 드냐?”
찬혁은 그저 눈만 꿈뻑꿈뻑 거리며 기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야, 얼굴 구멍 나겠다. 그만 쳐다봐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너, 너 진짜구나!”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뭐, 뭐, 다른 것도 해줘?”
“그래 내친김에 해봐.”
“지랄하지 말고 술이나 먹어.”
“정말 신기하네. 허, 참네.”
찬혁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신기한 듯 자신의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살펴보자, 기명이가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사실 인간들이 몰라서 그렇지 각자 배정된 수호천사들이 도와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
“예를 들면?”
“음, 흔히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잖아. 십년감수했네 라든지 큰일 날뻔했네 같이 그런 일들이나 상황들 말이야. 그런 게 우연이나 운이 아니란 거지.”
“그럼, 그런 게 전부?”
“그래 맞아. 모두 우리한테 도움을 받은 거야. 뭐 그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도 바쁘다 보니 놓칠 때도 있긴 하지.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본인의 명이 다 할 때면 모를까, 정해진 운명이 아닌데 갑자기 생명에 지장이 있거나, 우연한 큰 사고에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나서는 거야.”
기명이가 말하는 동안 찬혁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입부터 다물어라 벌레가 들어가겠다. 아까 가로등 밑에서 싸우던 녀석들 데려오랴? 사실은 오늘 내가 나타난 건 해줄 말이 있어서야.”
“해줄 말..이라니?”
기명이가 술잔을 단숨에 비워내며 말을 이어갔다.
“참내, 나 또 이거 시말서 감인데. 월권한다고 야단맞을 거 같은데.”
“뭔데? 그렇게 위험하면 하지 마!”
“지랄은 수확도 안 하고 매번 풍년이냐? 니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기명이가 찬혁을 째려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 건배!”
두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이어서 사이좋게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입에 물었다.
“찬혁아..”
“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기명이가 한숨을 뱉어 내듯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조만간, 은미 씨한테 큰일이 잇따라 닥칠 거야.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큰일이라니?”
“흥분하지 말고 들어. 곧 이사할 곳에서 사기를 당할 거야. 그래서 지금보다 여러 가지로 더욱 힘들 거야.”
“뭐라고?”
“그러니까 잘 들으라구!”
“내가 해결 방법까지 어느 정도 안내를 해줄 테니, 넌 나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 만일 약속을 어기고 니 마음대로 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알았어?”
“뭔데 빨리 말해봐!”
“첫째! 이번 주 주말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에 로또를 사. 그 와중에 누군가 너를 새치기하면 화내지 말고 양보해 줘. 확실하게 장담은 못 하지만, 그 시간대에 내가 말 한 대로 하면 확률이 높다는 것만 알아둬. 둘째! 혹시라도 당첨됐다고 은미씨를 만나러 가면 절대 안 돼. 내가 올라가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는 절대로 안 돼. 알았어?”
“그렇게만 하면 돼?”
“그래. 그런데 쉽지 않을 거야. 은미 씨가 아프다고 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만나러 가면 안돼 알았어?”
“은미가 아파? 어디가 어떻게?”
“자세한건 지금 말해줄 수 없고, 어쨌든 은미 씨한테 힘든 일이 겹쳐서 일어날 거야. 그래서 너한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해도 올라가면 안 돼! 알았어?”
“근데 그게...”
찬혁이 자신감 없는 표정을 짓자 기명이가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난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주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
“알았어. 왜 화를 내고 지랄이야.”
“만일, 약속을 어기고 올라가면 모든 게 꼬여버려. 너나 나나 은미씨나 모두 힘든 상황에 빠진다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리고 은미 씨에게도 오늘 일을 말하거나 어떤 내색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
“자, 막잔하고 난 가야겠다. 내말 잘 기억해라.”
기명이는 그렇게 무거운 짐과 선물, 두 가지를 찬혁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찬혁은 떨리는 마음과 흥분 그리고 걱정을 가지고 숙소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장 주변은 사출기계가 돌아가는 소음과 날벌레가 춤추는 가로등 불빛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