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 엇갈리는 인연.
서울에 도착한 찬혁은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기명이가 말 한 대로 인천에 가면 자신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믿음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신도림에서 인천행 전철을 갈아타고 전철 노선도를 바라보았다. 찬혁은 노선도를 한참 바라보다가 어느 정거장 한 곳에 눈길이 멈췄다. 그 많고 많은 정거장 중에서 유독 눈길이 계속 머무는 곳이 있었다.
'간석 오거리?'
간석 오거리역은 찬혁이 탄 1호선에서 인천 전철로 환승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오로지 느낌과 감으로만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무척 생소했지만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속에 확신을 주었다. 결국 부평역에 내린 후 간석 오거리 역으로 환승하기 위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부평역에는 환승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랐을 때, 불현듯 현기증과 함께 여러 장면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는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하상가에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기도 하고, 장난치다가 달래주기도 하는 행복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에스컬레이터 입구 위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로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보브 헤어스타일을 한 여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지나갔다. 찬혁은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몸을 돌렸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 후 였다.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뒤, 잠시 떠올랐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며 간석 오거리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간석 오거리 역에 가까워질수록 머리는 점점 더 깨질 듯이 아파왔고, 오한이 들 만큼 식은땀까지 흘리며 괴로워 할 때 드디어 간석 오거리 역에 도착을 했다. 예기치못한 심한 두통과 식은땀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승강장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또다시 빛의 속도로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무지개색 머플러를 고쳐 매 주던 자신의 손과 밝은 미소를 짓던 여자의 입모양이 떠올랐다.
“아까 그 여자가, 여기.. 여기가 맞구나. 바로 이 자리가..”
이후로 전철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계속 지나갔지만, 찬혁은 양팔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괴로워했다.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어느 작은 원룸.
은미가 축 처진 어깨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은정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는 투덜댔다.
“참 말 안 듣네. 아줌마..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자꾸 어딜 나가요?”
“그냥, 답답해서 바람 쐬고 왔어.”
“어이구 거짓말까지?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아니 그냥...”
“또 아저씨 찾으러 갔으면서 둘러대긴.. 엄만 거짓말하면 티가 나요 티가.”
“어떻게?”
“저렇게 말하는거 보면 거의 백퍼 지, 엄만 말 습관이 그래. 내가 딸이 돼가지고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싱겁기는... 나 좀 잘게 피곤하네.”
“시간만 나면 그렇게 쏘다니는데 안 피곤한 게 이상한 거지. 그나저나 이제 그만해요. 이때까지 안 나타난 거면, 난 도망 갔다고 봐! 힘드니까 우릴 버린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만해라.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너도 잘 알잖아. 아저씨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니?”
“됐고요! 난 안 보이는 그 양반보다 눈앞에 보이는 내 엄마가 더 걱정이야. 몸도 불편한 사람이.. 제발 어두워지기 전에는 들어와요. 그러다 넘어져서 다치면 어쩌려구 정말. 자꾸 그러면 못 나가게 한다!”
“아유 저 잔소리, 알았으니까 그만해. 잘게..”
“그래 잘 자요 엄마.”
은미가 방으로 들어가자 은정이 한참 동안 방문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에서 피스포르테를 가져와 창가에 올려두고 혼잣말을 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저렇게 기다리는데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은정이 피스 포르테를 한 모금 마신 후,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가 방충망을 뚫고 나가다 바람과 함께 이내 빠르게 흩어졌다.
“후~ 젠장, 이래저래 술이랑 담배만 느네.”
어두워진 초겨울 밤 하늘 위로 토끼가 떠난 초승달이 홀로 외롭게 잠을 자고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몇 개 남지 않은 마른 나뭇잎과 이별하기 싫은 듯이 흔들거리며 안타까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길 잃은 바람이 나뭇잎을 응원하듯 휘잉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다음날.
[띵동 띵동~]
평소 술이 약한 은정이 전날 과하게 마신 와인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은정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후, 문으로 다가가 작은 문구멍을 통해서 찾아온 사람을 살펴봤다. 밖에 서있는 사람은 키가 제법 큰 남자였다. 그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입고 있는 셔츠 앞에 달린 단추만 보였지만, 후줄근한 셔츠 색상과 때가 묻어있는 장화가 얼핏 보였기에 남자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은정은 낯선 남자가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는 긴장했다.
“누구세요?”
“여기 배 은미씨 집 아닌가요?”
“그런데 누구신데요?”
“아, 맞나 보네요. 따님이시죠? 박 찬혁 씨 아시죠? 저 찬혁이 친구입니다.”
은정은 순간 평소에 엄마에게 들었던 아저씨 친구 이름을 떠올렸다. 하지만 만나본 적도 없던 남자였기에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아네, 그런데 무슨 일로... 지금 엄마 나가고 안 계세요.”
“어디 가셨어요? 전해 드릴 말이 있는데..”
“아침에 일찍 나가고 안 계세요.”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없을까요? 찬혁이 이야기인데.”
은정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아저씨 친구고 엄마의 지인이라 하더라도 여자 혼자 있는데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집에 들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같이 몇 번 만난 적 있어요.”
“죄송합니다. 문을 열어 드릴 수는 없구요.. 전할 말씀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아, 그래요.”
기명이는 조금 서운했지만 나름 생각해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와 같이 계신 거예요? 어디 계세요? 교통사고 났다고 하던데 괜찮으신가요?”
“한 가지씩 대답해 드릴게요.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어디 계세요?”
“아마도 인천에 있을 거예요.”
“인천이요? 그런데 왜 같이 오시지 않고...”
“사정이 좀 있어요. 교통사고 때문에 기억을 못 해요.”
“기억을 못 한다고요?”
“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찬혁이 스스로 기억을 찾아야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어쨌든 같이 오셨어야죠. 안 그래도 엄마가 엄청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도 아침부터 가 볼 데가 있다고 일찍..”
은정은 엄마 생각에 잠시 울컥해서 말이 끊어졌다. 성치 않은 몸으로 매일 남편을 찾아다니는 것을 생각하자니 같은 여자 입장에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은미 씨는 괜찮으신가요?”
“엄마도 뇌 수술을 받아서 좋지 않아요. 성치 않은 몸으로 저렇게.. 제가 말려도 안돼요.”
기명이는 은정이의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슬픈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죠.. 인연이니까. 하지만 가급적 말리세요. 성치 않은 몸으로 그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분은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
기명이의 확신에 찬 긍정적인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말투에서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묻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 둘 만요? 아저씨는요? 아저씨도 괜찮은 거 맞죠?”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럼 이만 가봐야겠어요. 은미 씨 들어오시면 찬혁이는 너무 걱정 말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몸 추스르고 나면 집으로 돌아올 거니까 찾느라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해 주시고요. 그 말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기명이가 떠나고 은정은 레몬 차를 한 잔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여전히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과 분주하게 지나가는 자동차들, 그리고 일상 속 흔하게 들리는 생활 소음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부러움의 대상처럼 느껴졌다.
같은 날 간석동.
찬혁은 하룻밤을 모텔에서 보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낯선 곳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듯한 동네 분위기로 인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기에, 분명 이곳에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골목을 누비며 동네 분위기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을 때, 작은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졌다.
잠시 건물을 살펴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되고 작은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다 어느 원룸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서서히 가슴속에서 먹먹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뻗어서 문에 갖다 댔다. 그 순간 또다시 두통과 함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조각들 때문에 휘청거렸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들과 행복한 몸짓과 웃음소리...
“누구세요?”
문이 열리면서 낯선 사람을 발견한 한 남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찬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이사 오신지 오래되셨나요?”
“왜 그러시는데요?”
“저는 이곳에 살았던.. 아니 산 것 같은.. 사람인데요.”
“네? 산 것 같다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봐요!”
원룸 세입자는 수상한 사람의 줄행랑에 큰소리로 불렀지만, 찬혁은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 자리를 황급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얼마 동안을 걸어 나온 뒤 큰길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뒤로 어제 역에서 보았던 보브 헤어스타일을 한 여성을 또다시 발견했다. 그 여성은 무엇인가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찬혁은 자신이 찾고 있던 여자임을 확신하고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급한 마음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한 것이었다.
[빵빵 빠~앙]
갑자기 도로로 뛰어나온 찬혁 때문에 놀란 승용차가 건널목 앞에서 급히 멈추면서 호된 욕설이 날라들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재수 없게 말이야. 뒈지려면 혼자 뒈지라고!”
건널목에 서있던 사람들도 찬혁을 수군대며 바라보았고, 멈추었던 승용차도 분이 풀릴 만큼 욕설을 뱉은 후 지나갔다. 드디어 신호등이 초록색 신호로 바뀌자마자 찬혁은 건널목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맞은편으로 건너갔지만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찬혁은 망연자실한 채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아직 기억이 안돌아 왔나 봐?”
찬혁의 옆에는 기명이가 서 있었다. 기명이는 앉아있던 찬혁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나 드디어 찾은 거 같아. 누군지 모르지만 그 여자가 확실해. 가끔 기억 속에 나타나는 여자랑 어제오늘 본 여자랑 똑같아.”
“그래? 근데 그 여자 어디 있는데?”
“방금 전에 봤거든. 길 건너편에 있을 때 봤어. 그런데 건너와서 보니까 어디로 가버렸는지 안 보여.”
“.....”
찬혁은 기명이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느끼자 기명이에게 매달렸다.
“너.. 알고 있지?”
“.....”
“알고 있지? 그렇지? 야, 어서 말해줘. 어서!”
찬혁이 흥분하며 팔을 붙잡자 기명이가 팔을 뿌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난 더 이상 말해줄 수 없다고. 네가 시작한 모든 것은 네가 마무리하는 거야.”
“우리 친구였다며.. 그리고 지금도 친구잖아. 제발 부탁이야.”
“지금 내가 말해버리면 너한테 더 안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더 말해 줄 수 있어. 여기 인천 말고 부천으로 가봐.”
“부천은 왜?”
“더 묻지 말고 그리가봐.”
“참 비싸게 구는 친구구만. 넌 내가 이렇게 되기 전에도 그랬어?”
“아니지, 질문이 잘못됐어. 넌 친구인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항상 그런 식이었지. 심지어 네 자신에게 까지도! 넌 스스로를 돌아보지를 않았어. 모두 남 탓을 하거나 주변 탓이었지. 지금 그 대가를 받는 거고.”
“그렇다 치자!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인간이면 다 그런 거 아니야?”
“재밌네...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니.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게 문제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죄는 모두 해결하고 가게 되어있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머지를 죽은 뒤에 받는 거지. 그걸 사람들은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데, 뭐 그건 알아서들 판단하시고.”
“저번에도 느꼈지만 넌 뭘 아는 듯한 눈치다. 아니, 뭐 도사나 천사쯤 되는 거냐?”
"글쎄,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일단 기억부터 빨리 찾도록 해. 네가 늦을수록 힘들어지니까 명심하고. 또 보자.”
기명이가 떠나고 찬혁은 길거리에 홀로 서서 기명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부천이라...‘
기명이의 말을 생각하며 간석 오거리 주변 골목을 걸어갔다.
지하철 출입구 계단, 밤이되면 화려해 지는 포장마차, 술꾼들의 해장을 도와주는 즉석우동가게, 주점 끝자락에 위치한 양 꼬치 가게 등을 지나칠 때면 찬혁의 가슴은 마치 첫사랑을 만날 때처럼 설렜다. 그런 느낌을 받는 곳을 지나칠 때면 반드시 자신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한동안 서서 기억을 해내느라 애를 썼지만, 순서가 맞지 않은 퍼즐 조각을 끼우는 것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래, 일단 부천도 가보자‘
기명이의 힌트대로 부천으로 가서 확인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간석 오거리 역으로 향했다. 표를 사기 위해서 출구 계단으로 내려가자마자 보브 헤어스타일을 한 여성이 출구 계단 옆으로 지나가며 즉석우동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즉석 우동가게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뒤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다시 골목 안으로 걸어가서 작고 오래된 원룸 건물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건물을 한참 바라보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그 순간, 위로하듯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그녀가 두른 무지개색 머플러가 바람결에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