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화 구세군의 제안.
병원에 도착한 찬혁은 은미의 상태를 보고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갑자기 발생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심 정지 상태를 간신히 넘긴 후, 모든 바이탈 사인이 급격히 저하 되었기에 앞으로 24시간을 넘기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찬혁은 황망한 마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와서 무심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살려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 한다!’
찬혁은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기명이를 불렀다.
“이 사람이.. 급할 때만 부르라니까. 뭔 일인데?”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딨어! 기명아 나 좀, 아니 은미 좀 살려줘라.”
“허.. 참내. 야! 난 그런 능력은 없어! 내가 윗분도 아니고..”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뭐라도 해줘! 나,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응?”
“이런 난감한 놈을 봤나. 사람 목숨이 그렇게 맘먹은 대로 다 될 것 같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 세상에 너 같은 사연 있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야? 그렇다고 전부..”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그러니 제발.”
“와... 이거, 이거 정말 대책 없는 놈이네. 못 알아들어? 그 부분는 내 소관이 아니라고!”
“그럼 꺼져버려! 무슨 수호천사가 그런 것도 못하는 건데?”
“미안하지만, 난 너한테만 해당된다고. 지금으로서는 나도 달리 방법이 없어. 은미 씨의 병이나 죽음은 자연의 이치야.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해.”
"그럼 은미 수호천사는? 나한테 네가 있는것 처럼 은미한테도 수호천사가 있을것 아니야."
"내가 담당한테 물어보지 않았을 것 같아? 우리들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 친구도 난감해 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약속했다고! 내가 지켜 준다고 했단 말이야! 난 약속을 지킬 거야.”
“그래 네 마음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미안해.”
“그래, 알았어.”
고개를 숙인 찬혁을 뒤로하고 걸어가던 기명이가 뒤돌아서서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찬혁이 너 말이야. 내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쁜 생각 하면 안 된다. 알았지!”
“......”
계절은 초겨울로 접어들었지만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믿었던 기명이에게도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자 찬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분위기 연출을 위해서 가게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송을 틀어 놓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으며 들뜬 모습으로 찬혁의 옆을 지나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구세군 자선냄비가 찬혁의 눈에 들어왔다. 찬혁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동그랗고 빨간색 자선냄비에 넣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은미를 살려 주세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고 난 후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누군가 찬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구세군이었다.
“간절한 소원이 있나 봅니다?”
“네?”
“음...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네요,”
“아니에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찬혁이 손을 빼며 목례를 하자 구세군은 낚아채듯 다시 찬혁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 아니.. 그렇게 사양하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정말 간절한 게 아니라는 건데요.”
“아저씨가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그럴까요? 일단 들어나 봅시다. 혹시 알아요? 내가 수호천사라도 될지. 허허.”
찬혁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이라도 할 생각으로 은미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털어놓았다. 그러자 답답했던 가슴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 후련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제안이요? 어떤...?”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제안입니다.”
구세군의 갑작스러운 말에 찬혁은 깜짝 놀랐다.
“네? 뭐, 뭐라고요?”
구세군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옷깃을 다잡으며 옷매무새를 고쳐 입었다. 그러고는 제식병처럼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찬혁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일단 저는 수호천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 아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 아니, 천사는 좀 낯간지럽고 에.. 뭐라고 표현 할까요. 그래그래, 그냥 또 다른 능력자 정도라고 합시다.”
찬혁은 기명이에게 들은 사악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나자 두려움에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다, 당신이..”
“에헤이! 겁먹을 것 없어요. 난 사람을 헤치지 않아요 그럴 권한도 없고요. 가끔 심술 나면 재촉은 하지요. 어때요, 아내를 살릴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들어 보시겠소?”
“......”
“자 그럼, 대답이 없는걸 보니 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먼저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급해요. 당신 아내에겐 얼마 없습니다 지체 할 시간이 없어요. 아시겠어요?”
찬혁은 두려웠지만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만큼 찬혁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을 만큼 간절했고, 구세군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나..”
“글쎄요, 제가 아는 바로는 몇 시간 안 남았는데,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무슨 결정이요?”
“당신 목숨과 맞바꾸는 거지요. 뭐 어려운 말로다가 희생? 뭐 그리들 이야기 합니다만..”
구세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슥했다.
“저보고 자살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찬혁이 상기된 표정을 짓자 구세군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큰일 날 소리를...”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구세군은 오른손으로 아래턱을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찬혁을 힐끔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입으로, 말로만 하시면 끝납니다. 쉽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말의 힘은 무섭죠. 특히 말로 하는 약속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안에는 혼이 담겨있으니까요. 아내분께서 당신을 용서한 상태라서 당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희생은 가능하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한다... 이야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그래서 그저 내 영혼을 드립니다 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요. 쉽죠?”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에이, 속고만 사셨나 보다. 그러니 그 인생이 매일 힘들었지. 허허허.”
“그 말이 정말이라면 은미가 살았다는 걸 먼저 확인시켜 주세요.”
“흠.. 급한 사람이 누군데 조건이 너무 건방지시네요. 은행에서 대출받는 사람이라도 이런 태도라면 곤란할 텐데. 싫으면 관두세요.”
구세군이 강하게 나오자, 찬혁은 무엇에 홀린 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아닙니다. 죄송해요! 당신 말대로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은미만 다시 살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할게요.”
구세군은 기다렸다는 듯 찬혁을 힐끔 쳐다보고는, 양손으로 코트를 툭툭 털고는 당당한 모습으로 허리춤에 양팔을 올렸다.
“흠, 뭐 정 그렇다면 연말이기도 하고 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은 내가 특별히 선심을 쓰리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안 그러면 두 사람 모두 각오하셔야 할겁니다. 아시겠어요?”
“...네.”
잠시 후, 구세군은 눈을 감고 한동안 무엇인가 중얼거리다가 눈을 떴다. 그러고는 느끼한 미소를 짓더니 양팔을 벌려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 이제 됐소! 당신 아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일 없이 일어날 겁니다. 이제 당신 차례요.”
찬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제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내 영혼을... 드립니다.”
“하하하 좋아요 좋아. 조만간 당신의 영혼을 가지러 누군가 올 겁니다. 얼마 안 남은 시간동안, 그때까지 나머지 인생을 후회없이 잘 즐기시길 바랍니다. 아참, 인간이라 후회를 안할 수는 없겠군 하하하. 그럼 저는 이만..”
구세군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찬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믿기지 않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같은 시각 병원.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은미의 바이탈 사인이 정상으로 회복됐고 의식도 다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은정은 은미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나 알아보겠어? 나야 나 은정이야!”
“그래 은정아..”
“이제 됐어! 됐어! 고마워 엄마. 깨어나 줘서.”
“은정아. 아저씨, 아저씨 어디 있니?”
“응, 아저씨도 어제 집에 오셨어. 잠깐 볼일 있다고 나가셨는데 곧 오실거야.”
은미는 오랫동안 누워있던 환자라고 못 느낄 만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정이 당황하며 말렸다.
“엄마! 뭐 하는 거야!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왜 이러는 건데? 아직 이러면 안 돼!”
“그 사람, 아저씨한테 가봐야 해!”
“갑자기 아저씨는 왜? 곧 오실거야.”
“꿈에서.. 아니다, 말하자면 길어. 갔다 와서 말해줄게.”
“엄마!”
은미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서 택시를 탔다.
“영등포역으로 가주세요.”
은미가 탄 택시는 찬혁과 처음 만난 영등포로 향해서 출발했다. 겨울비는 어느새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