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닮은 눈물

by 글싸라기

2-10 화 비를 닮은 눈물.

영등포역 앞 번화가.

은미는 비 오는 거리를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며 돌아다녔지만 찬혁은 보이지 않았다.

“은미 씨! 그만해요.”

“기명 씨.”

“우리 그이 어디 있어요? 기명 씨는 알죠?”

“미안해요. 찬혁이가 일을 벌이고 말았어요.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 그놈 아마도 지금 병원에 도착해서 은미 씨가 회복한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럼 다시 병원으로 갈게요.”

“아닙니다. 일단 카페에라도 들어가 계세요. 제가 찬혁이를 먼저 만나야 해요.”

“왜요? 뭔가 잘못 된거죠?”

“지금 설명드리기는 길어요. 일단 제가 찬혁이를 먼저 만나야 하니 기다려주세요.”

“네 알겠어요.”

그 시간, 병원에 도착한 찬혁은 정말로 은미가 깨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찬혁은 기쁨으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기명이를 불렀다. 그러자, 기명이가 나타나 씩씩거리며 다가가 찬혁의 뺨을 후려쳤다.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목숨을 함부로 놀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그럼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은미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그렇다고 그런 짓을 저질러?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참견하지 마! 내 인생이야!”

“아, 그러셔? 인생이 그렇게나 소중한 녀석이 그동안 그따위로 살았어?”

“기명아. 나도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잘 알잖아.”

“인간들은 이래서 안 돼. 모든 걸 자기 연민으로 자기합리화할 뿐이지.”

“어쩌겠어.. 그게 인간의 모습인걸.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이잖아.”

“그래그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모르겠어. 나도 두려워 하지만, 지금 내가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고 이게 지금의 최선인건 너도 잘 알잖아. 은미는 어디 있어?”

“너, 정말... 너 찾는다고 지금 영등포로 갔어. 왜 영등포로 갔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라 그럴 거야. 빨리 가자.”

“잠깐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결을 해 볼 테니까 아직 은미 씨에게 가지 마. 시간을 좀 벌어야 해. 둘이 같이 있다간 둘다 큰일 나.”

“네가 어떻게 하려고? 방법이 있어?”

“쉽진 않은데 해봐야지. 대신에 내가 말할 때까지 은미 씨는 아직 만나면 안된다. 알았지?”

“언제까지?”

“아직은 잘 몰라. 확실한건 지금 둘이 있다간 둘다 위험해. 그 놈들이 그걸 노린거라고. 일단 제발 내 말대로 해.”

“알았어.”

기명이가 떠난 뒤, 찬혁은 병원으로 들어가서 은정이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당부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또다시 하고 말았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멀리서 얼굴만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찬혁은 기명이의 신신당부를 잊어버리고 영등포로 향했다. 겨울비는 그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영등포역 앞.

찬혁은 오래전 은미를 처음 만났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앞에 다다르자 오래전의 추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혼자서 이런저런 지난 추억을 떠올리다가 은미가 있을만한 카페골목을 돌아다녔다. 그 시간 은미역시 카페에서 나와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연말연시를 앞둔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게다가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찬혁은 언제 어디서 은미를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바라본 길 건너편에 무지개색 머플러를 두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머플러가 드디어 찬혁의 눈에 띄였다. 찬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드디어 은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 내 아내가 건너편에 있었다. 찬혁은 얼굴만 보기로 한 다짐을 까맣게 잊은 채, 은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도로 위로 발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목청껏 은미를 불렀다.

“은미야!”

많은 인파와 빗소리 때문에 건너편까지 목소리가 들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은미는 여전히 오고 가는 많은 인파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은미야! 은미야!”

찬혁은 더욱 큰 목소리로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찬혁은 자신도 모르게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봉봉아! 봉봉아!”

찬혁의 애닮은 마음이 전해진 걸까, 은미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찾고있는 찬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익숙한 목소리가 은미의 귀에 들렸다.

“봉봉아! 봉봉아!”

“자기야? 자기 맞아? 어디있어!“

찬혁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잘 들리지 않자, 은미는 무지개색 목도리를 풀어서 번쩍 들어 올린 뒤 힘껏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수많은 사람들과 우산 사이로 무지개색 머플러가 우뚝 솟아올랐다.

“여기야! 나 여기 있어!”

길 건너편에서 흔들리는 무지개색 머플러를 본 찬혁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찬혁아. 안돼!”

“어딜! 이미 끝난 일이라네.”

“비켜! 더러운 것들.”

구세군이 나타나 기명이를 가로막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일부 권한을 내려놓은 기명이의 힘만으로는 구세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러면 곤란해. 자네는 늦었어. 자네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책임도 면치 못하겠지?”

“난 상관없어 저리비켜!”

“끝났다니까.. 알잖은가! 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인간은 모두 자신이 선택한 운명의 길을 간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희생,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지라네. 유일하게 그런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부러울 뿐이야.”

“찬혁아..”

커다란 트럭이 찬혁에게 다가왔고, 그러고는 찬혁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높이 뜨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찬혁의 눈앞에 넓은 하늘이 펼쳐지더니,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로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고는 마치 정지 화면처럼 천천히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과 무지개색 머플러를 들고 있는 은미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 많이 야위었지만 오똑한 코와 귀여운 입모양, 그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웠는지.. 이제라도 이렇게 보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야 남편 노릇을 다 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내 사랑.'

이윽고 땅 위로 떨어진 찬혁은 기명이의 품에 안겼다.

“야 인마. 정신 차려! 찬혁아! 119좀 불러주세요. 아무나 빨리요.”

“미안해, 기명아.. 약속을 또 어겼네. 그런데, 나... 은미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미안해.”

“야! 말 그만하고 정신 차리고 있어!”

“기명아.. 은미한테 말해줘.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전해줘.”

“조금만 참아. 곧 구급차가 올 거야. 그러니까...”

“기명아 그만해. 알잖아.. 그래도 다행이야. 눈 대신 비가 내려서 내가 슬프게 울며 갔다는 걸 모를 테니까.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자고 전해줘. 내 친구 기명이 고마웠다.”

“찬혁아! 찬혁아!”

찬혁의 뺨 위로 비를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멀리서 은미가 무지개색 머플러를 손에 쥔 채 뛰어오고 있었다.

이전 09화구세군의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