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공연.
우리는 시간만 나면 모여서 합주를 했다. 세곡만을 가지고 연습하려니 지겹기도 했지만 리더인 철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연습은 공연처럼, 공연은 연습처럼! 연습에서 100%라고 해도 무대에선 어떤 변수 때문에 80%도 안 나올 수 있어. 지겹다고 하지 말고 눈 감고도 몸이 저절로 움직일 때까지 연습해야 해."
철이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게 또래 같지 않았다. 무척 어른스러웠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이해였다.
물론 녀석은 음대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으니 사실 놀라울 일도 아니었고 멤버들은 그런 철이를 마치 동생처럼 잘 따랐다. 적어도 음악에 관해서는....
어느 날 합주를 마치고 철이 내 집 인근 실내 포장마차에 모두 모였다. 고등학생들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기는 쉽지 않아서 대부분 둑이나 놀이터나 공터의 으슥한 곳에 숨어서 먹지만 우리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손님이 뜸한 이곳 실내포장마차의 사장님은 스스럼없이 술과 찌개를 내주었다. 돈 없는 고등학생들이 마셔봐야 얼마 못 마시지만 우리들의 유일한 일탈장소이자 해방구였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은 술잔을 앞에다 두고서 각자의 개똥철학이나 앞으로의 인생계획이나 나름의 삶의 의미 등을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밤이 깊어지고 얘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들의 우정은 점점 깊어져 갔다.
각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하는 도중 철이가 대뜸 어수선한 대화를 종결짓듯이 말을 한다.
"내 생각에는 어떻게 사느냐보다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비록 빗자루질을 하는 청소부가 되더라도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느닷없는 깊이 있는듯한 철학적인 말투와 내용에 한 사람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한 사람은 술잔을 쥐고 입술은 일십 자로 꾹 다물고 있었으며 나는 철이를 멀뚱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내심 놀라서 그렇게 본 것이었다. 어떻게 같은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어서 그런가 생각하고 나름 억지로 이해하는듯한 제스처를 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이 분위기에서는 멍청하다는 핀잔을 들을 분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내린 나름의 처세였다.
"이 세상은 생각만으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되고 가치가 부여된다고 생각해."
대단한 발상이다. 갑자기 철이가 우뚝 서있는 거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철이가 말한 묵직하고도 심도 있는 이야기 덕에 그런 주제로 각자의 의견과 토론이 늦은 밤까지 이어졌으며, 우리는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빈 소주 병도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늘어갔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 우리는 정말로 아티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한껏 들떠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레퍼토리 중 하나인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큰소리로 불러 재끼며 어두운 도시의 거리를 요란스럽게 걸어갔다. 그렇게 고등학교 락커들의 추억꺼리가 하나둘씩 새겨져갔다.
공연 당일.
나를 비롯한 멤버들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어제저녁만 하더라도 까짓 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너스래를 떨던 녀석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지만 대놓고 크게 웃지는 못하였다. 나도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합주 때마다 2번 줄이 끊어졌는데 걱정이네 또 그럴까 봐... 여분으로 새줄을 챙겨오긴 했지만.."역시나 철이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철이가 몸이 먼저 반응하기 위해 지겹도록 연습을 하라는 얘기였구나 생각하며 다시 한번 철이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했다. 보컬은 벽에 머리를 대고는 발성연습을 하며 목에 좋다며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목을 관리하는가 하면, 드러머는 틈틈이 고무판에다가 파라디들을 연습했다. 다들 열심히 예열을 하였지만 내 눈에는 모두가 긴장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 보였다. 나 역시 베이스 기타를 끌어안고 스님이 염주를 손가락으로 굴리듯이 하염없이 크로매틱 스케일로 손가락을 풀고 있었다. 사실 연습은커녕 조바심과 긴장감 때문에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움직이는 습관적인 몸부림이었다.
"자 너희들은 맨 마지막이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다른 학교 학생들도 있으니 소란 피우지 말고 또 담배 피우다가 걸리면 알지?"
순서를 알려주려고 온 선생님이 노파심에 걱정 반 협박반으로 미간에 힘을 주며 말을 하고는 나간다.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니 신경을 쓸수가 없었던것이 더 맞는 상황 이었다.학교가 개방되고 남자뿐이 없는 학교에 많은 여학생이 방문을 한 상태이기에 분위기도 그러하였지만 선생님들도 초긴장 상태라 이해는 되었다.
합창단 연극 에어로빅 통기타 연주 웅변 등등 우리들에게만큼은 지루하다고 표현하는 것들이 차례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진행되어갈수록 우리들의 표정과 몸짓은 더욱 굳어져갔다. 드디어 다음 차례다. 아까 미간을 찌푸리던 선생님이 다시 들어오셨다. "준비들 해 다들 기대하고 있다. 실수하지 말고."모두들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드러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스틱을 쥐고 문 앞에 서있었으며 보컬은 그 뒤에 요상한 모양으로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가하며 서있었고 나는 베이스 네크를 왼손으로 굳게 잡았다. 뒤돌아 철이를 보았다. 철이는 곧 나가려는 찰나까지도 서있는 자세로 스케일 연습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앞의 공연자들이 퇴장하자 마치 판토마임을 하는 것과도 같고 혹은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무언으로 공격 지시를 내릴 때 하는 손짓과도 같은 어우적 거림으로 우리들에게 어서 나가라고 알려준다. 우리는 무엇에게 빨려 들어가는듯하게 무의식적으로 우르르 나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들어와 본적 없었던 강당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 무대조명을 위하여 평소보다 어두워진 무대 뒤편을 총총걸음으로 걸어나가자 점점 빛이 새어들어왔다.
드디어 무대다. 드럼 세트가 차려져있는 무대를 마주하고 베이스 앰프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잭을 꽂고 볼륨과 톤을 세팅하였다.그리고는 와~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기가 눌릴 정도로 관중이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여학생들을 배려해 준 것인지 밴드가 나온다니까 우리를 보기 위함인지 앞쪽에는 전부 여학생들이 앉아있었다. 사실 후자 쪽으로 믿은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황홀했다."전부 정신 차리고 악보 까먹지 말고 볼륨 너무 크게 하지 말고 알았지?"
철이의 당부의 말도 귀에 안 들어왔지만 그냥 알았다고 말하고는 다들 자신들의 악기 위치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대조명이 꺼지고 철이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첫 곡은 신나는 곡으로 시작하기로했다.마이클쉥커 그룹의 "닥터 닥터"....
순간 가슴이 벅차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철이의 기타 인트로 가 시작되고 올파트의 리듬. 셔플 리듬인 흥겨운 사운드가 울렸다. 와~아하는 관중들의 함성과 언제 긴장했냐는듯한 멤버들의 연주. 그리고 커다란 앰프에서 들려오는 나의 첫 공연에서의 일렉트릭 베이스 소리. 꿈만 같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나 떨리고 긴장하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무대가 갑자기 편안하다 못해 생기까지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면서도 벅찬 느낌이다.
그동안의 슬픔과 우울함 고통 등의 감정이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느낌이랄까. 정말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마치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그래그래 고생했어. 잘 해내고 있어. 멋지다. 넌 해낸 거야."이렇게 얘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첫 곡이 끝나고 이어서 두 번째 곡을 드러머가 스틱을 세 번 두드리는 신호에 맞춰서 들국화곡을 연주했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다들 아는 곡이라 그런지 더욱 반응이 좋았다. 멤버들도 연주에 심취하고 분위기에 취해서 점점 몰입하여갔고 정말 락커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밴드이기에 사고는 터지고야 말았다.
우리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연습하고 연습했던 명곡인 레드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연주할 때였다. 초반의 인트로는 무난하였으나 중반에 접어들면서 호흡이 안 맞기 시작하더니 리듬 파트들의 엇박자가 이어졌고 연주가 틀렸어도 중간에 음악을 멈추면 절대로 안 된다는 철이의 당부로 인하여 고쳐지지 않는 엇박자에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역시 명곡을 연주하기엔 우리는 역부족 이었던것이다.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렇게 우려했던 철이의 두 번째 줄이 끊어졌다. 나는 속으로 "망했다."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베이스 연주를 멈추었고 드럼도 고개를 숙이고 스틱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최악으로 끝날 줄 알았던 순간 놀랍게도 철이만은 연주를 멈추질 않았다. 보컬도 후반부의 격정적인 샤우팅에 가세를 하였고 기타와 보컬만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멍하니 그 둘만 바라보았고 베이스와 드럼이 연주를 멈출 때 관객들도 눈치를 채고 조금씩 실망의 미소와 웃음이 나오다가 두 사람의 열정적인 마무리 연주를 보고는 더욱 큰 환호를 보여줬고 심지어는 앵콜이라는 함성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철이가 순간 지미 페이지로 보였다.
앵콜이 끊어지지 않자 철이가 선생님과 귓속말을 하고는 우리에게로 와서 한마디를 던진다."내가 빨리 기타줄을 바꾸고 오는 동안 선생님이 시간을 끌어주실 거야. 라우드니스의 라이크 헬 가자. 다시 못 올 학창 시절의 추억이잖아. 이대로 멈추긴 아쉽지 않아?"우리는 한마음이었던 걸까? 동시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이 흘렀을까 철이가 기타줄을 바꾸고 나오자 와~하는 함성이 나왔고 드럼의 스틱 부딪치는 신호 세 번 "딱 딱 딱~"
그렇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앵콜곡이 시작되었고 강렬한 헤비메탈 사운드와 철이의 놀라운 라이트 핸드 주법으로 우리는 나름대로의 화려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날 저녁 많은 후회와 웃음, 서로에게 격려 등으로 소주잔을 비워냈으며 그렇게 내 음악 인생과 베이시스트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