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잔과 맥주잔.

존재의가치

by 글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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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는 져서 어두운 저녁이지만 도시의 길거리는 밤하늘의 별이 내려앉은 듯 휘황찬란하다. 초록색 핑크색 파란색 등등 여러 가지의 보석 같은 빛은 크기도 다양하게 눈이 부시도록 감성을 자극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저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즐겁고 행복한 사연들로 그렇게 눈부신 거리를 가득 매우며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흐르는 불빛과 함께 사람들도 순간의 추억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멋진 거리의 불빛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빛 요정들의 취침시간을 알리듯이 하나둘씩 꺼져만 간다. 거리의 주인공들의 막이 내릴 시간인 새벽 2시가 돼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구에 내려온 별들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불빛 요정들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려 반짝거린다. 그 시간... 한쪽 골목 끝에 자그마한 주점에서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투덜거림이 골목에 흘러나온다.

"에휴...도대체가 방법이 없는 건가. 이것이 정녕 나의 길인 것이 가 말이야."

아무도 없는 주점 안에서 귀신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문 닫은 술집에 몰래 침입하여 술이라도 훔쳐먹는 취객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윽고 다시 말소리가 들린다.

"어째서 이렇게 한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냐고. 매일 남들에게 푸대접이나 받으면서 말이지."

억양은 점점 고조되어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냥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벌일만한 분위기까지 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거참 듣고 있자니 짜증 나서 못 듣겠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시끄럽게 구냐고."

두 명이다. 한 명이 아닌 두 명.... 누군가 대꾸를 하자 잘 만났다는 듯이 대화가 시작되었다.

"너는 잠자코 있어! 나보다 대접이 좋은 양반이 내 마음을 알기나 하겠어?"

"허허... 그래그래 그렇다 치고 무슨 일이기에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게 투덜대는지 말이나 해봐."

"그래 툭 터놓고 말이나 해볼까 들어나주게나."

"그래 내 오늘은 대화 상대가 되어줌세."

자신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얘기를 듣자 어느 정도 누그러진듯한 그가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처지를 보라고... 인간들의 화풀이 상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깨질뻔하기도 하고, 또 냄새나는 돼지고기를 먹은 기름진 입술로 내 몸을 더럽히질 않나... 그리고 내 몸을 보라고 와인잔이나 당신 같은 맥주잔은 그래도 늘씬하고 글씨나 그림도 멋진데 난 이게 뭔가 녹색 글씨로 깨알만 하게 낙서도 아니고 휴... 스트레스가 한두 가지도 아니고 이렇게 살바에는 아까 2차로 온 신경질 많은 그 손님에게 그냥 깨져버렸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이 드네."

소주잔이 이었다. 불만이 많은 소주잔.

주점 안에 술잔들이 사람처럼 말을 한다니... 놀라운 광경이지만 숨죽여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숨기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그렇게 봇물 터진 듯이 불만을 얘기하는 소주잔을 지켜보던 맥주잔이 심드렁하게 말을 건넨다.

"그러지 그랬어?"

"뭐야? 이 작자가 얘길 들어준다더니 화를 돋우는구먼."

"이보게 소주잔 당신은 왜 스스로를 그렇게 괴롭히는가? 나는 무슨 불만이 없는 줄 아나?"

"나보다 크고 독한 소주보다 향긋하고 시원한 맥주를 담고 게다가 맥주를 품으면 영롱한 황금색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무슨 불만이 있다고..."

소주잔의 툴툴거림에 맥주잔은 한마디로 쏘아붙인다.

"이 사람아 당신은 깨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불만만 늘어놓다가 정작 자신의 소중함의 가치를 모르고 그렇게 나쁜 점만 느끼고 한숨만 내쉬다가 깨지려고 생긴 게 아니란 말일세. 와인잔도 위스 잔도 맥주잔도 모두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함께 축하해 주고 힘들고 슬플 때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태어난 거란 말일세. 당신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깨지기만 기다린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다네. 단점만 보고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린다면 그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말일세."

맥주잔의 일침에 의기소침해진 소주잔이 볼멘소리를 한다.

"그래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무 지친단 말일세. 어제는 아르바이트생이 술잔을 한군데 모아서 설거지를 하다가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져서 깨질뻔했지 뭔가."

소주잔의 말에 맥주잔이 껄껄 웃으며 말한다.

"거 보게 이 양반아 당신 자신도 그렇게 깨지고만 싶지는 않은 거였어. 막상 위기가 닥치니 살고 싶어진 거지. 그러니 그만 징징거리게나. 당신 말처럼 우리는 하루가 위태롭기도 해. 사람을 잘못 만나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동안 인간들을 잘 살펴보았다면 느끼는 것이 있을 거야.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고달프다네. 그 증거가 우리 아니겠나... 그들이 우리를 만날 때가 가장 힘들 때라고. 물론 기뻐서 찾을 때도 있지만.... 기억하게 우리는 깨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술이담겨져서 영롱하게 빛을 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흠... 고맙네 당신 얘기를 듣고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는군... 비록 내일도 똑같은 일상으로 나름의 고통을 감수도 해야겠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것.... 그렇게까지 대단한 줄은 몰랐는데 고마우이."

"그대가 그렇게 느꼈다면 이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네 나도 고맙네 친구..."

"친구? 허허허... 그래 오늘 같은 이야기 말고 다른 즐거운 주제 또 얘기 나누세."

"그래... 그럼세."

그렇게 소주잔과 맥주잔은 달그락거리며 그들만의 즐거운 몸짓으로 새벽시간을 향기롭게 채워갔다.

그 순간....

"이보세요 집에 가서 주무세요... 손님 때문에 저희 종업원이 퇴근을 못해서요."

이런... 술 먹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하고 시간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회사에서 가벼운 실수를 가지고 고참에게 자존심 상한 말까지 들은 나는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어서 혼자 주점에서 술을 먹다가 뻗은 것이었다.

퇴사를 할까 이렇게 살바에는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뺨에 흘러내렸던 침까지 닦아내며 주점 안에 술잔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나왔다.그리고는 왠지 모를 기운이 솟아났다.

"나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존재일 거야. 나는 실패를 한 게 아니야 경험을 쌓은 거지.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이렇게 마음을 먹자 가슴속에서 행복한 감정이 솟아났다. 민폐를 끼친 주점 사장과 종업원에게 사과와 인사를 건네고 계산을 한 뒤 주점문을 나서면서 뒤돌아서 진열장의 맥주잔과 소주잔을 보았다.

나는 웃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보냈고 그들도 웃으며 배웅하는듯하였다.

새벽 공기가 무척 달콤했으며 발걸음도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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