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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Sep 17. 2023

체스를 두는 두 노인

1화 행복.


초겨울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어두운 저녁 들판.

검은색 외투를 입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간신히 걷고 있는 노인. 저 멀리 보이는 묘하게 생긴 건물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오랜 된 고성 같기도 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래된 성당 같기도 한 건물이 우뚝 서있다. 건물 내부에는 각 기둥마다 마치 공룡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듯이 붉은색과 주황색으로 버무려진 등불이 주변의 어둠과 어우러져 오묘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그 빛으로 인하여 주변이 꽤나 넓은 공간임을 느끼게 해준다. 실내에 가구들이라고는 벽 쪽에 드문드문 기대어져 있는 서랍장. 그리고 크리스털로 보이는 반짝이는 와인잔들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옆에 다이닝 테이블이 있고, 고풍스러운 기다란 창틀 아래에는 벽난로가 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서로 마주 보고 세워진 의자 두 개 사이에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이 있다.


'끼이익~'

신비스러운 고딕 문양이 새겨진 두껍고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열린다. 그러자 오래된듯한 이곳의 실내공기를 환기라도 시키려는 듯 실내 쪽으로 무거운 바람이 휭 하고 소리를 내며 문을 연 사람보다 서둘러 먼저 들어간다. 그 바람과 더불어 이때가 싶은 마른 나뭇잎이 동그랗게 소용돌이를 만들며 신이 난 듯이 가장자리로 물러서며 흩어진다.

'저벅저벅'

노인은 발걸음을 실내로 옮기며 무심히 주변을 휘익 둘러본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양쪽으로 벌어진 카이저수염 끝을 쓸어 올린다.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니까.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이젠 미간도 모자라 얼굴 전체를 구겨가며 혀를 끌끌 차며 그 누군가를 못마땅해 한다. 이 노인의 이름은 소르판 하이네르. 소시지 한 덩어리에 아이리시 위스키 세잔이면 휘청거리는 노인이지만, 누군가와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면 유리구슬 같은 눈빛과 핏기 도는 뺨이 마치 혈기왕성한 청년 같은 그런 존재다.

소르판은 왼쪽 입꼬리를 실룩 거리며 장식장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다이아몬드 무늬가 새겨진 크리스털 잔을 꺼내서 다이닝 테이블에 올려놓고 포도주 병을 움켜쥐고 양껏 따른다.

"어허 체스를 두기도 전에 음주라니... 이미 게임은 포기한 것인가?"

저만치 어두운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에서 들리는 인기척. 나무라는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만,소르판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크리스털 잔을 들어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눈까지 감고 음미한다. 그런 소르판을 보며 어둠 속에서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빈속에 술을 마시다니 딱딱한 염세주의자가 이제 낭만주의자가 되기라도 맹세를 한겐가 허허."

소르판은 오른쪽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고는 나지막하지만 제법 강경한 목소리로 일축한다.

"입으로만 나불대지 말고 이리 와서 불이 나 지피지 그래."

"허허허 그럼세."

흔들의자가 빙글하고 돌아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노인이 안경과 읽고 있던 책을 협탁에 내려놓고 양팔로 의자 손잡이를 힘겹게 누르며 몸을 일으킨다. 흰색 셔츠에 회색 조끼를 입은 모습이 단정한 노신사, 바로 그런 차림이다. 창백하리 만치 하얀 얼굴과 포마드를 바른 듯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과 깔끔한 헤어스타일의 이 노인의 이름은 윌리엄 니쉬.

지금은 자신의 놀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친구를 위하여 불을 지피기 위해 벽난로로 걸어간다. 그래도 걷는 모습이나 발걸음의 경쾌함, 게다가 한 손에 지팡이가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적어도 소르판 보다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좋은 윌리엄이다. 그런 체력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호두 한 줌이나 건포도 한 줌이면 스카치위스키 한 병쯤은 아직 거뜬한 윌리엄이다.


벽난로 옆에 놓여있는 마른 장작을 들어서 벽난로에 던져 넣으며 윌리엄이 소르판에게 부탁한다.

"아이리시 위스키 옆에 있는 스카치위스키 한잔 부탁하네."

"빈속이 어떻고 낭만주의가 어떻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어허 이 사람 삐진 게야? 그러지 말고 부탁함세."

"난 자네가 말한 사실을 상기시킨 것뿐일세."

"알았네 알았어 미안하네 허허."

"격자무늬 잔이 맞나?"

"그래 맞아."

소르판이 윌리엄의 술을 따르는 동안 윌리엄은 장작에 불을 지피고 잘 타오르도록 불쏘시개로 주변을 다지고 있다. 초겨울이지만 제법 바람이 차다. 게다가 하늘에는 살짝 기울어진 초승달이 스산함을 더해 주는듯 하다.소르판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동행한 낙엽들이 블루스를 추듯 마른 소리를 내며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 옆을 스르르 지나간다.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 생각은 해 봤는가?"

윌리엄이 제법 불길이 오르는 장작을 등지고 소르판을 바라보며 질문을 한다. 그러자 지팡이에 의지한 채 출렁거리는 술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오는 소르판이 말한다.

"생각해 볼게 뭐 있겠나. 질문 자체가 답 아니겠나."

"너무 성의 없고 포괄적이네."

술잔을 받아든 윌리엄이 못마땅한 듯 입을 씰룩 거린다.

"잘 알잖은가. 세상 모든 질문은 이미 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렇지만 아무리 옳은 것이든 기발한 것이든 정체된 생각은 의미가 없다네. 지금의 우린 어제의 우리가 아니듯이 말일세."

"흠 그럼 슬슬 한판 두면서 대화를 해보자구."

"그러세."

두 사람은 마치 결승전 대국을 치르는 선수들처럼 어깨를 으슥하며 체스 테이블로 이동한다.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두 노인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거니 받거니 체스를 두었다. 그들의 소리 없는 신경전에는 옆에서 타오르는 모닥불만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윌리엄이 격자무늬 크리스털 잔속에 스카치위스키를 입안으로 모두 털어버리고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먼저 말을 꺼낸다.

"질문 말일세... 인간에게 행복은 최고의 목표인가?"

왼쪽 팔로 턱을 괴고 있던 소르판이 눈만 위로 치켜뜬 상태로 윌리엄을 쳐다보며 대꾸한다.

"행복? 행복이라.... 그것은 단지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에 지나지 않은가. 단지 그 느낌만을 가지고 기나긴 여행과 같은 삶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네."

윌리엄이 격자무늬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으며 즉시 반문한다.

"어째서인가?"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보석들은 각 보석마다 등급이나 가치는 달라도 보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각기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지. 그래서 그 가치를 한 가지 잣대로만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네."

"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또한 행복이 됐건 육체의 쾌락이 됐건 아니면 사랑이나 우정 등등 모든 인간의 감정은 그다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네. 오히려 고통이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네. 그래서 행복은 고통만 느끼고 산다면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기에 잠깐 쉬어가라는 의미로 행복을 넣어준 거지... 마치 낭떠러지로 내려진 기다란 로프 중간중간에 매듭을 지어놓듯이 말일세. 그래서 행복은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저 한숨을 돌리는 여유일 뿐이지."

"그럼 그 누군가가 고통이라는 형벌을 주고 또, 잠깐의 휴식을 준다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설마 그 존재가 혹시 신이라는 말인가?"

여전히 왼팔로 턱을 괴고 있는 소르판은 오른쪽 손가락으로 테이블 가볍게 두드리며 대꾸한다. 이번엔 두 눈을 체스판에 고정시킨 채다.

"음... 아마도."

"이런 이런 하하하."

소르판의 말을 듣고 윌리엄은 팔짱을 끼며 허리를 곧추 세우며 큰소리로 웃는다.

"역시 염세주의자 다운 해석일세 그려."

윌리엄의 말에 소르판이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잔을 들어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이보게 소르판.자신의 견해일 뿐이니 이해는 하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석하면 인간의 삶이 너무 참담하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가 아닌 모든 게 신에게 달려있다니."

다시 소르판이 질문을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게 자네의 하루를. 하루 동안 자네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감격에 겨워 행복하게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행복이라는 감정을 미소나 즐거움이라는 것에만 국한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네."

"감정이라며...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 감정이지 그런데 행복한 감정이나 기분은 미소만 짓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네."

"그럼 뭐가 더 있나?"

"자네도 말했듯이 인간의 일생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많은 감정도 일어나고 말일세. 미소를 짓는 단순한 즐거운 감정만이 행복의 조건만은 아니지. 예를 들자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면서도 느낄 수 있고, 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자신 스스로를 이겨내는 내적 성숙을 통해서도 행복한 감정은 존재한다네. 인간은 스스로 바로 설 줄 아는 힘을 가졌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행복의 참된 가치라고 생각한다네"

"행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네만 수단과 과정일 뿐 목적에는 동의하지 않네"

 "그런 측면에서는 나도 동의하네. 하지만, 행복을 규정짓는 범위는 자네의 그것보다는 범위가 넓다는 것이지. 그리고 적어도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비관적이라... 나는 있는 그대로를 보며 직시하는 것일 뿐이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아닌가?"

"자네야말로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생각하네."

"음 평행선이군. 그저 행복이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순 없다는 합의점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 좋겠네."

"그래 그것이 좋겠군."

두 사람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다시 체스판을 들여다본다. 벽난로에 장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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