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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Sep 20. 2023

체스를 두는 두 노인(2화)

2화 성공.

어느덧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듯한 초승달만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는듯했다. 그러나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기 시작했기에 두 노인이 머무는 공간에도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한 잔의 술과 모닥불 만으로는 한기를 이겨내기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운 기온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소르판이다.불편한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아이리시 위스키나 한잔해야겠네. 자네는 어떤가?"

팔짱을 끼고 체스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윌리엄이 눈은 체스판에 그대로 둔 채 대답한다.

"음 그럴까? 그래야겠군... 몸을 좀 데워야겠어."

윌리엄의 대답이 끝나자 소르판은 술잔들이 있는 장식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네 식사는 했나? 뭐 좀 요깃거리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소르판의 말에 윌리엄이 팔짱을 풀고는 그에게 다가간다.

"말린 말고기와 파르마산 치즈가 조금 있긴 해."

"오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리고 여기 소금을 뿌린 아몬드와 캐슈너트도 있군."

"완벽해 아주 좋아."

"혹시라도 쥐새끼들이 훔쳐 먹을까 봐 깊은 곳에 숨겨뒀지."

윌리엄이 까치발을 하고는 높고 구석진 진열장 한곳에서 기름먹인 종이뭉치를 간신히 끄집어내 소르판앞에 펼쳐놓는다. 조금 흐트러진 모양이긴 했지만 보관된 상태는 훌륭했다.

소르판이 파르마산 치즈 한 덩어리를 조금 떼어서 코로 가져가서 냄새를 맡고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오 이런 이런 치즈는 언제나 나의 영혼을 설레게 하지."

소르판은 마치 시를 읊듯이 감탄사와 함께 찬양을 하며 치즈 조각을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윌리엄은 오물거리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군. 세상을 다 가진 그런 표정이야."

그러자 소르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한다.

"자네 몰랐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때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는 것 말일세. 이것은 매혹적인 여성과 함께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과는 비교도 안되는 훌륭한 감흥이지."

소르판은 의기 양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린 말고기 한 조각을 집어 든다.

"그런데 말이야 인간의 본능 중 무언가에 도전을 하고 이뤄내어 성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가?"

"내 생각은 행복이나 성공이나 또 그 무엇이든 간에 인간의 욕구는 부질없다고 본다네. 물론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본능을 억제하긴 불가능하지만, 난 대부분이 욕심이라고 생각하네. 어차피 인간의 시간은 유한한데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인간에게 모든 건 찰나일 뿐 영원한 건 없지."

윌리엄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역시 자네 다운 해석일세."

"그럴 줄 알았네. 이의를 제기해 보게나."

윌리엄은 창가 쪽으로 다가가 기울어진 초승달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의미 자체가 없어지지. 난 여전히 인간을 믿네. 아니, 인간의 의지를 믿지. 강력한 자기애로 시작된 의지력은 단순히 표면적인 혹은 물질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성숙으로부터 시작한 올바른 인간으로 완성되는 진정한 성공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네."

"하하 너무 거창해. 잠자리에 독수리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아닌가."

"그렇지 자네가 보기엔 그렇게 보일 게야. 인간 자체를 신뢰하질 못하니 말일세."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뿐이네."

"난 사실 자네에게 조금 화가 나네."

"왜지?"

"그렇게 확실하고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는 자네가 어떻게 불확실한 신의 존재를 믿는지... 모순 아닌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부정할 순 없네. 세상은 염세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두 가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네. 한 가지 더 꼽자면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인간에겐 한 축이라네. 신은 죽었다고 생각이 들게끔 말하는 자네에겐 불편한 진실 이겠지만."

소르판의 공격적인 주장에 윌리엄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단지 인간의 강력한 의지력을 강조하려 했을 뿐 유신론자를 겁박하고자 한 의도는 없다네. 혹시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말해보게 기분에 따라서는 인정할 수도 있지."

소르판이 장난스럽게 양팔을 들어서 으슥댄다.

"신은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죽었다는 표현 자체가 그전에 이미 존재했다 라고 하는 역설적인 증명이란 생각은 안 해봤나? 게다가 신에게 죽음이란 단어를 적용함으로써 이미 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표현일 뿐이네. 강력한 의지력에 대한 선망은 어쩌면 나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원동력일 수도 혹은, 증명된 신념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네."

"그렇다면 인간에게 성공이란 결국 물질적인 성공에 앞서 인간 스스로 내적인 의지로만이 가능한 내적 성숙에 귀결되는 기쁨이란 것인가?

"음식을 담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네. 그릇 크기만큼 담을 수 있지. 그것이 허황되건 불필요한 것이든 상관이 없다네 인간은 필요로 하면 의지가 생기고 목적이 생기며 성취하면 행복이 되지. 그것이 비록 오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살아가는데 에너지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소르판은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며 질문을 한다.

"유한적이고 부질없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겐 

큰 의미가 있다니... 게다가 인간의 의지력에 기반한 내적 성숙을 통해서 이뤄야만 진정한 성공이다?"

윌리엄도 소르판과 마주 앉으면서 대답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욕심을 자제할줄 알아야만 하네. 빛에 가까이 갈수록 빛은 눈을 멀게 하지. 명확하게 보려면 때로는 빛을 등져야 한다는 깨달음의 지혜가 필요하다네."

소르판이 체스판 위의 비숍을 전진시키며 말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다분히 흥미롭구먼."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나?"

"그러고 싶지는 않네."

"하하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두 사람은 다시 체스판 위를 바라보며 분주히 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문에 비친 초승달, 모닥불과 체스판 그리고, 두 노인. 이렇게 초겨울 어둡고 스산한 실내는 한 폭의 유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으며, 그런 실내의 모습은 계속되는 무언의 대화를 이어가는 두 노인이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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