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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Oct 15. 2023

체스를 두는 두 노인(4화)

4화 운명(마지막 화)

두 사람은 여전히 턱을 괴고는 체스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게임에 열중했다. 그런 몇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바깥바람도 잔잔해졌으며 벽난로의 모닥불로 인해서 실내 공기는 제법 훈훈해졌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은 피곤함과 나른함을 느끼고 더 이상은 체스 게임도 힘든듯했다.

소르판이 움츠렸던 허리를 가까스로 세우고 기지개를 켜면서 말한다.

"이제는 자네와 오랜 시간 게임을 두는 것도 힘드는구만.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어 버릴 것만 같네."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움직이는 그를 보며 윌리엄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왜 아니겠나 나이가 있으니 당연한 거지. 나 역시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찌뿌둥 하네."

소르판이 일어나 장식장 쪽으로 걸어가며 말한다.

"우리 마지막으로 딱 한 잔씩만 하세나..."

"음 그러세."

윌리엄도 소르판 뒤를 따라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술을 잔에 따르고는 다시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소르판은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에 집중하는 듯  미간에 살짝 힘을 주며,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가 펴면서 질문을 한다.

"우리 오늘 참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네. 그런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고민이라고 할까 아니면 욕구라고 할까 그 모든 것들이 만일 이미 결정된 수순에 의해서, 혹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면 자네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소르판의 질문에 윌리엄은 양쪽 입을 삐죽이며 대답한다.

"또 신의 존재. 뭐 그 타령인가?"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언제 어떻게 될지는 궁금하기만 하고... 인간이 노력한다고 원하는 대로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그렇지 원한다고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지... 하지만 내가 늘 말했듯이 인간이기에 또한 가능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네. 모든 것은 선택이고 그것에 대해 만족하기 힘들고 후회가 따를 수도 있지만 다른 어떤 것에 이미 결정되었거나 알 수 없는 신의 의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적어도 나는 그렇다네..."

"결국 자네는 여전히 인간의 미래나 운명은 스스로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살이가 너무 서글프지 않나?"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네. 인간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미리 대비하거나 만족할 만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본다네. 신이 존재하는지는 나도 의문이긴 하네만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발상도 좀 안일한 생각이 아닐까?"

윌리엄은 소르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음 뭐 자네 다운 생각이야. 전혀 틀리다고 말할 근거 또한 없고. 그러나 운명론이니 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적어도 인간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네."

"그렇다면 운명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도 인간은 바꿀 수도 없고 따라야 하는 것이며, 결과에 따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인간의 의지로 이겨내고 바꾸면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건가?"

"그래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궁금해할 이유조차도 없지. 한가한 자들이나 그럴 여유가 있는 거지.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네. 과거는 배설물이며 미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네. 과거나 미래는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일세. 지금 현재에 집중하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네."

윌리엄의 말에 소르판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 오늘은 어찌 된 건가 자네가 나처럼 얘기하는 것 같네. 마치 염세주의자처럼 말일세."

윌리엄이 검지를 가로로 휘저으며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면서 말한다.

"음 음 아니지 아니야 염세주의적인 개념은 아니지. 단지 알 수 없는 것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네.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고 지금 현실에 충실하라는 뜻인 게지."

소르판은 그의 말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는 팔짱을 끼고는 오른손으로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술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피곤해서인가 몸도 뻣뻣해지는듯하고 머리도 몽롱해지네."

"그러게 점점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군. 혹시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두 사람은 몸살이라도 걸린 듯 양쪽 팔을 감싸 안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느 선가 돌풍이라도 불어오듯이 거센 바람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우 욱."

"아 악!"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광경에 놀라기도 했지만 점점 굳어져 가는듯한 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람 때문에 창문도 열리고 벽난로의 장작도 거센 바람에 거의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본능적인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꿈이 아니라면 분명히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이겠군.]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오히려 마음은 편해지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두 사람의 발끝은 석고상처럼 서서히 굳어져 갔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면서... 서서히 가슴까지 조각상처럼 굳어갔다. 그때 마침 소르판이 눈을 감은 채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윌리엄! 이것은 신의 계시인가 장난인가 아니면 우리의 운명인가?"

윌리엄도 눈을 감은 채로 대답한다.

"난 빌어먹을 신의 그 무엇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어쨌든 내 친구 소르판! 즐거웠네."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온몸이 하얀 석고상처럼 굳어 버리자. 사방의 벽들은 일제히 펼쳐지듯 넘어졌고 지붕은 바람에 날아갔다. 그러고는 청소를 하듯 주변의 모든 잔해들은 바람에 흩어지고 나서야 바람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늘 높이 구름을 헤치며 커다란 손이 두 사람 아니 두 동상 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치 체스판 위의 말을 집어 들듯이...

그러고는 지상에 있는 동네 크기만 한 거대한 체스판 어딘가에 동상을 내려놓는다. 그다음 다른 손이 내려오더니 나머지 동상한개를 집어 들고는 맞은편 어느 곳에 내려놓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커다란 두 손은 얼마나 컸던지 하늘에서 내려올 때 해가 가려져서 몇 초 동안은 일식이 일어날 때 느껴지듯이 어둠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손의 주인은 하늘에서 살고 있는 영적인 존재들... 인간들은 이것을 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두 신중에서 한 신이 입을 열었다.

"우리 신들은 인간들을 처음에 이렇게 만들지 않았어.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 스스로가 편하고 좋을 대로 바꾸고 변형하며 그렇게 선택을 한 것이지. 심지어 자신들의 사상까지... 그 증거가  바로 방금처럼 우리가 자신들을 거둬들이는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더군. 인간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를 못하더군. 그것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 체 말이야."

맞은편에 있던 다른 신도 말을 거든다.

"음 그렇지... 인간의 변화란 지켜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더군. 결국 자신들이 편하고자 모든 것을 파괴하더라고. 간들의 모든 고민과 그들이 말하는 운명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미 결정한다는 것을 모른 체 말이야. 모든 걱정과 염려는 결국 자신들의 편안함과 욕심으로 인한 것이고 우리는 결코 그것을 허락한 적 없지 않은가 말이야. 스스로 무덤을 파고 그 안에서 우울해하는 꼴이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그래 아까도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듣고 있자니 기도 안 차서 두 인간을 거둬들였다네."

"그래 잘했어. 안 그랬으면 내가 나서려고 했어."

"자 이제 말도 바꾸었으니 다시 한판 두 자고."

"그러지... 이제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간들이 좀 조용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하하하... 인간들한테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군. 자 게임 시작하세나."

드디어 바람도 잦아들고 구름도 물러갔으며, 소르판과 윌리엄이 머물던 곳은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  


4화 운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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