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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Oct 25. 2022

죽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야.





나의 어릴 적 집안은 잘 사는 편이었다. 그것도 그냥 잘 사는 정도가 아닌 강남 8학군으로 지금 구반포 아파트였고 포니와 제미니라는 자가용도 두 대였으며, 중국집도 두 군데나 운영하고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그것도 지폐로 지불하여 사 먹었던 시절, 미제 물건을 사면 불법이었고 장사꾼들은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받아와서 판매하는 것을 비싼 가격에 팔았던 시절. 1970년대 그 당시에는 국산 과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 미제 물건은 거래 자체가 불법이었으나 돈 꽤나 있는 강남의 부자들은 그런 미제 물건이나 과자류들을 구입해서 먹었으며, 그런 부자들의 자녀들은 길거리에서 자랑스럽게 과자봉지를 들고 다녀도 단속은 없었다. 그러나 주변 동네 사람들은 부러운 눈길과 따가운 눈길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그 당시에 나는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주로 "리츠"와"오레오"라는 과자와 "참스"라는 여러 가지 과일 맛이 들어있는 캔디가 들어있는 동그란 철제 통을 들고 다녔고 부러운 눈길로 내 뒤를 따라다닌 동네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인기를 얻었다. 딱지치기와 구슬치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나는 동네 놀이터를 평정하기까지 했으니 그 당시 나의 인기가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100만 원 하는 과외도 했으며 집안일을 하며 나의 뒷바라지를 해주던 "자야"라고 불리는 식모 누나도 기억이 난다. 그 누나는 토요일 저녁이면 요즘도 비싸서 먹기 힘든 영덕대게를 찜으로 요리해서 식탁에 올려주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초년에 운세가 좋다가 말년에 힘이 든 운세는 안 좋은 운세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정말 초년에 잘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군가는 평생을 힘들게 살기만 했는데 어쨌든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본 게 어디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것은 주관적인 관점 아니겠는가? 게 다 가 이후로 써 내려갈 나의 고백 담을 읽는다면 왜 이렇게 지난 어릴 적 부유한 생활을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를 깨닫지 못한 나의 부모님.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친할아버지 시절부터 반포동에 살 때까지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그 시절에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우리 부모님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는지 말이다. 현재 글을 쓰며 자기계발에 관심을 가지고부터는 조금씩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너무도 아쉽지만 알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부모님은 경제에 무지했으며 투자에도 관심이 없었다, 단지 열심히 일해서 벌어지는 노동력에만 의지한 것이다. 게다가 지출에 대한 계획 또한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굳이 핑계를 만들어내자면 당시의 금리는 예금 적금만 꾸준히 들어놓으면 꽤나 괜찮은 환경이 한몫을 한 것도 있었으며, 친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잘나가다가 친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시면서 망하게 되자 "사업은 위험한 것. 적게 벌어서 적게 먹고사는 월급쟁이가 최고."라는 인식이 깊게 뿌리박혀있었고 그런 생각을 자식들에게 확실한 명제처럼 밥상머리 교육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핑계를 대기에 앞서서 나 자신조차도 그런 말을 듣고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이 큰 문제였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인 것이었다.



오랜 기간의 시련과 포기했던 시간들.

미래를 대비 못한 부모 세대와 나의 지난 시간들. 20대를 지나고 30대로 접어들면서 두 번의 큰 시련이 찾아왔다. 백내장에 건강이 안 좋으신 부모님은 빚내서 장사를 하게 되고 점점 이자가 불어나면서 힘든 상황까지 연결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식도암과 후두 암 판정이 10년 새 발병이 되다 보니 집안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인간은 적당한 스트레스와 적당한 대미지를 입어야 다시 일어설 용기나 악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 나는 거의 몸도 마음도 모든 걸 포기해버리는 자포자기가 된 상태였고, 30대 중반에는 신용불량은 기본이고 주민등록 말소까지 당하다 보니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쥐며느리처럼 숨어 살아야 했다. 경제적인 부분도 당연히 주민등록 등본을 안 떼고도 현금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아웃소싱에서밖에 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급여도 시급제로 적용된 최저임금수준에서 그쳤으며, 공장과 막노동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도 계약 해지를 당하면 일이 끊기기 일쑤였다. 마음이 피폐해지니 움직이기도 싫었고 어떤 때는 피시방 야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온라인게임으로 현실의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밖에 생활하지 못했다. 매일이 술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허비하는 인간쓰레기 되었다. 어떻게 되겠지 아니면 죽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시간이 흘러가면서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뒤늦게 깨달은 중년이 되어서...

참 삶도 얄궂더라... 죽고 만 싶던 나에게 오기가 생기고 새로 시작하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바로 유튜브에서 자기계발에 관련한 영상에서의 강사님들과 유튜버분들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너무 늦은 내 나이 40대 후반 이 되어서이다.

처음에는 우연찮게 올라온 존리님의 주식에 관련한 경제 영상이 충격적이었다. 왜 이걸 지금 알았을까 하는 자신의 답답함. 두 번째는 김미경 강사님의 마인드 세팅에 관련한 영상으로 또 충격.그리고는 김경일 교수님의 인문학 강의, 신사임당 님과 자청님의 사업과 자기계발 관련 등등 그렇게 계속해서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맞으며 나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50년 동안의 굳어버린 태도와 습관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떨 때는 아무런 준비와 공부도 없이 무리한 투자를 하다가 손해도 보기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투잡도 닥치는 대로 해보았으나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는 일을 그것도 14시간씩 서서 일을 하는 주야 2교대의 일을 하다 보니 돈도 돈이지만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다 보니 중도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깊은 생각을 한끝에 도달한 것이 "공부"였다.

책을 읽자 공부를 하자 늦었지만 기초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현실적으로 맞는 일과 감수성과 음악을 할 때 작곡과 연주를 했던 창작적인 장점을 살린 글을 쓰고 작가가 되자. 소설가가 되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하자 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나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

아직도 나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내색하면 안된다. 아직도 빚에 허덕이고 먹고살기 위해서 지방에서 떠돌아다니며 현장일을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 비록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죽기 전에 깨닫게 돼서 감사한 일이다. 책을 읽다 보면 늘 깨닫는 게 있다. 지식과 경험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고 신나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부족한 것을 느끼고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가족도 보고 싶고 마음도 시리지만 그나마 글을 알게 되고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다. 더욱이 브런치에만 통용되는 작가라는 호칭이지만 나에게는 크나큰 결실이다. 그래서 브런치는 나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공간이다.

커다란 목표의 마지막 도미도를 향하여 아주 작은 도미노 한 개를 쓰러뜨렸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글쓰기... 후회로 일관된 나의 인생에서 부디 마지막 날에는 내 글을 읽고 좋은 영향을 받은 독자가 많이 생기길 바라면서 오늘도 피곤한 몸으로 눈물에 젖은 베개에 머리를 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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