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cker 15화.

15화 다시 세상 속으로.

by 글싸라기


강남 고시원으로 옮긴 나는 고시원 총무부터 시작했다.

일단 최소한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숙식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시원 총무라는 일은 그동안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나에게는 그다지 이질감이 없는 일이기도했다.입실자들의 출입관리와 때가 되면 입실자들의 월세를 받아내는 일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기에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생활 때문에 그들 중에는 소위 말하는 진상을 처리하는 일도 내 몫이긴 했지만... 새벽 5시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주방에 가서 입실자들을 위해서 밥통에 밥을 해놓는 일부터 시작이다. 그래도 강남이라서 그런지 쌀의 상태는 좋은 편이어서 손등에 물을 맞추어서 취사 버튼을 눌러 놓으면 그동안 내가 겪었던 떡밥보다는 훌륭한 쌀밥이 되었다.

주방 일이 끝나고 해야 할 주 업무는 어두운색으로 코팅이 된 유리창 아래로 달고나처럼 반듯이 잘라놓은 듯한 반원 모양의 숨구멍이 달린 고시원 출입구에 앉아서 입실자들의 오전 동안 동태를 살피는 것이다.

오전에 일찍 출근하는 입실자들의 움직임이 끝날 때쯤이면 무척 분주해진다. 주방의 설거지부터 화장실 청소, 게다가 받기로 한 월급 외에 추가로 10만 원을 더 받으려면 계단 청소까지 해야 했다. 강남지역에서 알부자였던 여사장 입장에서는 청소 용역 업체에 따로 돈을 지불하는 것보다 나에게 10만 원을 더 챙겨주고 청소를 시키는 게 더욱 이익이었고 나 역시 운동 삼아 조금 더 움직이고 부수입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생인 것이었다.

오전에 해야 할 여러 가지 숙제를 마친 나는 운동 후 먹을 나름대로의 건강식을 준비한다. 그것은 그동안 술로 인해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담긴 레시피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챙겨 먹은 식단은 구운 마늘 5쪽 생양파 그리고 상추였다. 그리고 김치볶음에 두부를 으깨어만든 덮밥용 비빔 김치가 나에게는 한 끼를 간편하면서도 밥도둑 역할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며칠간의 나만의 건강식을 준비하고서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청소하던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워밍업을 시작하고,

옥상에 올라가서 줄넘기를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20개만 해도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무거워져서 힘들었지만 조금씩 버티며 목표 횟수에 5개씩 추가하며 도전하다 보니 어느새 50개가 훌쩍 넘어섰으며 이제는 그다지 힘들거나 숨이 찰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등등 맨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운동을 죽기 살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의 컨디션 상태는 부쩍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줄넘기는 100회를 넘어섰다.

기초체력을 단련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서는 얼마 전 중고 악기 거래 사이트에서 사 온 5현 일렉트릭 베이스 연습을 시작했다. 외관은 맘에 들었지만 이름도 없는 그야말로 연습용 베이스 기타인 것이다. 원목의 무늬가 살아있는 이 악기는 한동안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었다. 정오가 되고 익숙한 발걸음과 목소리가 들린다.

"자 여기요... 오늘도 깨끗한 것만 담았어요..."

"아유...매번...감사합니다.잘 먹을께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중년부부... 저녁시간에 식당으로 출근하여 새벽 손님들에게 식사 시중을 들며 식당 일을 하는 부부가 가게에서 허락한 남은 반찬꺼리들을 나에게도 신경을 써주느라 챙겨 온 것이었다.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들 눈에도 내가 어지간히 안스러웠던 모양이다.검은 봉지에는 내가 좋아하는 미역 줄거리 볶음과 나물들 그리고 각종 밑반찬들이 비록 검은 봉지에 담겨있었지만 나름대로 정성껏 포장한 모양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는 매일같이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선물이었고, 검은 포장지안에 어떤 선물일까 하고 열어보는 기쁨이 하루 중에 가장 설레는 시간이며 그동안 인간의 정이 그리웠던 포근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고드름도 없어지고 햇살도 제법 따사롭게 느껴지는 이른 봄... 아직은 바람결이 날카로웠지만 그것은 현재 내 자신의 처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다행히도 냉정한 현실을 인지하고 또한 감수성까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대견하게까지 느껴졌다. 낡은 운동화와 무릎이 나온 청바지와 보풀이 일어난 후드티를 죄인처럼 얼굴과 몸에 두르고 부지런히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간다. 점심 무렵이라 골목에서는 매콤한 찌개 냄새와 참기름 냄새 같은 고소한 반찬 냄새들이 코끝을 유혹하지만 밖에서 돈을 내고 사 먹을 처지가 못되다 보니 마음이 살짝 우울해진다. 걷고 걷다 보니 어제 저녁에 미리 봐둔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 강남구청이 은백색 햇살 아래 동화 속의 고성처럼 웅장하게 내 앞에 나타났다.

1층 민원실에서 한곳만 응시하는 내 모습과는 달리, 나의 민원을 처리해 주려는 공무원들은 이미 몸에 배어있으면서도 기계적인 친절한 미소와 빠른 타자 솜씨로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모습들이다.

"다 끝나셨어요... 여기 주민등록증이요. 그동안 주소를 자주 옮기셔서 공란이 없는 관계로 새로 만들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안내를 하는 공무원이 입으로는 안내를 하면서도 또 다른 문의는 없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일 처리가 끝난 것을 나의 대답으로 확인한 공무원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나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외면하는 듯한 모습의 공무원에게 인사를 두번씩이나 하게 된 것은 왜일까?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그토록 감사했을까?

내 손에 든 주민등록증이 마치 특별 허가증처럼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을까? 서운함의 감정보다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세상에서 증발되어버린,몇 년 동안 그림자만 존재했던 나.

이제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시민으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MMORPG 온라인 게임에서 전직을 통하여 강해진 전사 캐릭터처럼.... 새로운 락커의 등장이다. 이날 저녁 고시원 건물 옥상에서 새벽 내내 혼자 흐느끼며 하염없이 별도 몇 개 없는 도시의 하늘만 바라보았다.옆에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Lynyrd Skynyrd의 Free Bird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The Rocker 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