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여성 락 보컬 그리고 새로운 만남.
서울에서 모든 정리를 마치고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다. 나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민등록을 말소시킨 채권자들은 내가 다시 주민등록을 갱신하자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일주일도 안되어서 우편물도 보내고 전화도 오기 시작했다. 나는 지체 없이 개인파산을 신청을 하였고 그 뒤로는 추심이 멈춰졌다.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5개월쯤 흘렀을 때 한 통의 우편물이 법원으로부터 내게 도착했다.
개인파산이 확정되었다는 내용. 맥이 팍 하고 풀려버렸다. 세상에서 증발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와 실패를 하면 안 된다. 한 번으로 족하다.
이제 나이가 30대 후반을 접어드는 시기까지 왔다. 마음은 급했지만 그동안 굳어버린 손가락은 마음만큼 따라주질 않았다. 정답은 하나였다. 무조건 연습을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낮에는 공장에 출근하고 저녁 9시에 나 돼서야 집에 들어와서 몸은 파김치가 되어있었지만 꿈은 저버릴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아까웠기에 빠른 속도로 샤워를 하고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해결하고 무조건 악기를 잡았다. 스케일 연습부터 카피 연습까지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생각하고 시계를 보면 어느덧 저녁 12시가 다되어가는것이 일상이 되었다.새벽에 일어나서 손가락 끝이 무뎌질 정도로 굳은살이 박인 것을 볼 때면 그래도 나름 뿌듯하기까지 했다. 내 귀에는 항상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일을 할 때나 길을 걸을 때도 오로지 음악 생각과 안 풀리는 플레이즈에대한 생각뿐이었다. 모든 감각이 음악과 악기 연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생 자체가 끊어진 매듭을 묶었다가 풀었다가 하는 것처럼 중간중간에 세상과 단절된 인생을 살다 보니 당연히 친구도 없었고 마땅히 오라는데도 없었으며 갈 곳 또한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베이스 기타가 친구였고 애인이었으며 가족이었다. 몸이 아플 때나 외로울 때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역시 내 곁에는 베이스 기타만이 내 옆을 지켜주었다. 그러다 보니 끌어안고 자거나 혼자 분에 못이길 상황에서는 베이스 기타에다가 화풀이를 해서 베이스 기타가 망가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병원인 리페어샵의 사장님이 오죽하면 베이스 기타에 무슨 짓을 그렇게 하냐고 핀잔을 줄 지경이었다. 그렇게 베이스 기타와 뒹굴기를 몇 달... 오랜만에 클럽 공연이 보고 싶어서 토요일 저녁에 나름 한껏 뽐을 내고 거리를 나섰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인천은 락밴드의 성지라고 한 기억이 난다. 아직까지 그 클럽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에 괜한 헛걸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토요일 저녁을 기분 좋게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작정 전철을 타고 제물포역으로 향했다.
역시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거리에는 축제 분위기 같은 들뜸과 설렘의 분위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어두운 저녁을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모두들 웅성거림과 한껏 고조된 웃음소리들로 북적거렸다.
언제나 맡아도 입속에 군침이 도는 치킨을 튀기는 향기가 거리 위를 가득 메우고, 실내 포장마차에서는 매콤하고 불향이 나는 듯한 구이 안주가 치킨의 기름기 있는 향기와 더불어 주점 골목이라는 것을 눈을 감고도 알 수 있게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미 취해서인지 무언가 못마땅해서인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는 무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들만의 재미난 이야깃거리들로 대화를 하는 무리들 그리고, 가게 안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잔을 부딪치며 미소를 짓고 있는 흥이 오른 주객들.... 모두가 몇 년 동안 잊고 지냈고 그리웠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춘 상태에서 잠시 그런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반가운 마음으로 흠뻑 느끼고 있었다. 그리웠던 풍경을 흐뭇하게 느끼고는 몸이 기억하는 곳으로 향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락카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작고 오래된 조그맣고 동그란 간판이 너무도 반가웠다.
계단이 가파르고 어두운 것도 있었지만 이미 공연팀이 연주를 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마치 집 나갔다 돌아온 고양이처럼 발끝에 힘을 주어 조심히 내려갔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이 잡스럽고 요염하며 강력한 사운드 말이다.기타톤이 두꺼운 것을 느낀 나는 깁슨 기타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서 두터운 가게 문을 조심히 열었다. 실내가 어두운 탓에 동공이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눈에는 한껏 힘을 주어 빨리 적응하려고 뚫어지게 실내를 응시했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그래봐야 연주팀들의 지인 내지는 친구들 이거나 멤버들이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은 관중 때문에 조금은 주눅이 들었다.
티켓값에 포함된 음료 교환권으로 버드와이저를 한 병 주문하고 앉을 자리도 없어서 객석 맨 뒤의 기둥에 오른쪽 어깨를 기대고 공연 중인 밴드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기타를 치고 있는 연주자는 마지막에 도망치듯 나온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꽁지머리가 아닌가.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움이 앞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보컬은 여성 보컬이었는데 가히 충격적 이었다. 가냘프고 여성스러운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컬의 성량이 남성 보컬 못지않은 음색과 파워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볼 뿐 처음 접하는 음악이라서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연주가 끝나면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면서 기다렸다. 공연팀은 전부 다섯 팀이었고 이미 세 팀은 연주가 끝난 상태였다. 현재 꽁지머리가 속해있는 밴드는 네 번째였다. 절제된 무대매너와 파워풀한 보컬의 노래가 끝나고 그들이 무대에서 인사를 마치고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무대에서 내려온 그들은 자신들의 악기 케이스가 놓인 자리에 앉자마자 꽁지머리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꽁지머리는 눈이 동그랗게 되더니 이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더니."
나는 미안함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꽁지머리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이제 제법 락커 같은데? 여전히 깁슨 추종자 답구만?"
"형 어떻게 된 거야 응? 인천에 다시 온 거야? 음악은? 베이스 기타는 여전히 치고 있는 거야?"
"응... 뭐 한참 동안 안쳐서 굳었지만 지금 열심히 연습 중이야."
내 말에 꽁지머리는 반갑다는듯하면서도 뭔가 급한 용무가 생긴듯 상기된 얼굴로 보채는 듯 말을 꺼낸다.
"아 그래 잘 됐네 오늘 시간 돼? 여기 밴드들이랑 뒤풀이 할 건데 같이 가자. 할 말도 있고... 같이 갈 수 있지?"
다른 밴들이 같이 간다는 말에 조금 망설여졌다.
"글쎄 내가 끼어도 될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아 다들 착해 형도 알아두면 좋은 사람들이야 이런 기회에 인사하면 좋지 뭘. 가자 응?"
"음... 그래? 알았어. 그런데 아까 연주한 음악은 뭐야?"
"아...판테라 라고 뉴 메탈이야. 형 안 들어 봤지? 내가 음원 보내줄게 한번 들어봐. 아 그럴 게 아니라 좀 있다가 설명해 줄게."
"그래. 그런데 너희 멤버 중에 보컬 말이야. 대단하던데 여자가 어떻게 그런 톤이 나오는 거야?"
"잘하지? 원곡에 원키로 부르는 거야 대단하지?"
"원키야? 오.... 정말 대단하네."
"내가 좀 있다가 인사 시켜줄게. 조금만 기다려 준비하고 올게."
"그래알았다."
꽁지머리는 다시 멤버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서 나를 가리키며 멤버들에게 무언가 설명하는듯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쳤으며 멀리서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락카페에서 나온 나와 무리들은 가까운 오래된 민속 주점같이 인테리어가 된 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테리어도 그렇지만 메뉴도 역시 민속 주점의 메뉴들이었다.다섯 팀이 한 테이블씩 앉다 보니 주점 안에는 만석이 되어버렸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왁자지껄하며 오늘 있었던 연주에 대해서 웃고 떠들며 다음에는 더 잘하자는 얘기들과 건배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처음 보는 멤버들과 동석을 하는 나는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꽁지머리가 맞선보는 자리에서의 주선자처럼 중간에서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만나서 반갑다는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술이 몇 잔 오고 갔다.
"얘기는 들었어요. 전에 오빠랑 같은 멤버셨다고..."
"아 네... 오늘 연주 훌륭했습니다. 잘 들었어요."
쑥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고 사양하는듯한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흉내만 내는 거죠 뭐."
"아닙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락음악을 해서인지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보다는 여성적인 목소리였으나 제스처나 어투는 다분히 털털하고 단호한 스타일이었다.
"자자 이제 인사들도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꽁지머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뭔가를 얘기하려 했다.
"오빠 그런데 너무 이르지 않아? 본인 의사도 중요하고 우리도 의논 좀 해야 하지 않아?"
여성 보컬이 꽁지머리의 다급함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니야 어차피 우리도 급하고 이 형도 지금 밴드가 없으니 늦기 전에 지금 의논하고 의향도 물어보는 게 좋지."
여성 보컬은 팔짱을 끼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듯했으나 이내 수긍하는 듯이 말을 한다.
"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럼 오늘 늦게 가더라도 얘기 마무리 짓자고. 정말 힘들다."
"오케이 알았어."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밴드 멤버들은 기타와 보컬 그리고 외인 구단이라는 만화에서 등장하는 백두산같이 덩치가 큰 드러머가 전부였다. 아까 본 대로라면 베이시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전부 세명뿐이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 나는 그들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일단 형 의견부터 물어볼게. 우리랑 밴드 해보는 거 어때?"
역시 짐작한 그대로다. 꽁지머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머지 두 명의 멤버들의 눈길이 나에게로 쏠렸다.
"아...."
이미 짐작은 했지만 막상 얘기를 듣고 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나야 감사하고 좋지만 내 실력이... 밴드 안 한 지도 오래됐고 게다가 아까 보니 요즘 트렌드에 내 스타일의 베이스가 맞을지도 모르겠고..."
나의 조심스러운 말에 꽁지머리는 다급하게 대답을 한다.
"내가 형을 몰라?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무리 급해도 이런 말 안 꺼내지. 형의 플레이즈는 내가 인정하는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야. 지금 우리 베이스는 공연을 위해서 잠시 객원으로 도와주는 사람 이거든. 같이 합시다."
꽁지 머리말에 보컬이 말을 이어간다.
"같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오빠 말대로라면 기대가 됩니다, 저희랑 하시죠? 도와주세요."
두 사람의 적극적인 공세는 더 이상 빼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분위기로 굳어져 버렸다.
소주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어 버렸다. 짧은 몇 초간의 판단. 까짓 거 어차피 해야 될 일이고 언제까지 준비만 할 것인가라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
"네 그럽시다.한번 멋지게 해봅시다."
"오 좋았어."
"감사해요."
우리는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며 한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하며 술잔을 계속 부딪쳤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고 음악 얘기며 잎으로 연주할 레퍼토리에 대해서 공유하며 내가 모르고 있는 요즘 트렌드에 대해서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날은 새벽까지 술에 음악에 빠져 있었다. 모처럼 만의 기분 좋은 주말 저녁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집이 같은 방향인 여성 보컬과 꽁지머리를 길건너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들이 택시를 탔을 때 담배연기를 뿜으며 미소로 인사를 하였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컬이 지켜보고 있었다. 택시는 빠르게 건너편 도로에서 출발을 하였고, 나는 반가웠던 새로운 인연을 흐뭇하게 생각하며 현재 이 좋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거리를 좀 더 걸어갔다. 하지만 이날의 헤어짐이 여성 보컬과 나와의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오해의 시작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