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해와 이해.
타고난 체질이 한몫을 한 것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그렇게 퍼부어 마셨어도 늘 일어나는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술로 인한 무기력증과 컨디션의 난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늘 그렇듯 난 습관적으로 1,5리터의 콜라병을 손에 쥐고 입으로 가져가 댔다. 검은 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탄산의 산뜻함과 달달한 감미로움이 온몸에 퍼지며 정신이 드는듯했다. 그러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꽁지머리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휴대폰 스피커에서 꽁지머리의 김빠진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형 술은 깼어? 괜찮아?"
"응... 내가 너냐? 괜찮아.."
나의 대답을 들은 꽁지머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추궁하듯이 말을 내뱉는다.
"형 어제 왜 그랬어?"
"어? 내가 뭘?"
"아니... 어제 길 건너에서 왜 비웃었냐고..."
느닷없이 형사 같은 억양으로 취조하는 듯한 꽁지머리의 질문에 순간 욱하는 감정에 대꾸를 한다.
"머라는 거야... 멀 비웃어?
"아니... 어제 우리 보컬하고 둘이 택시 타고 갔잖아."
"그래 그랬지."
"근데 보컬이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빴데... 마치 우리 둘이 무슨 이상한 관계처럼 생각하듯이 웃었다고 봤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저 새로운 만남에 반가웠고 사이좋게 귀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을 뿐인데...그 모습이 마치 '저 인간들 둘이 뜨거운 밤이라도 보내려고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고 기분 나쁘다고 매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뭐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확인도 안 하고 사람을 그렇게 매도를 하는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이 새끼야... 참내 어이가 없네 니들은 생사람 잡는 게 취미냐? 넌 그걸 또 중간에서 말을 전달하는 건 뭐냐? 그 보컬한테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해! 말 같지도 않은 얘기로 생사람을 잡고 지랄들이야!"
"아니 상대방은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잖아."
꽁지머리의 대꾸에 더욱 열불이 났다.
"야 이 개새끼야... 너 한 번만 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열받게 하면 디질줄 알아!"
"왜 승질을 내고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그냥 물어본 거잖아... 알았어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다시 연락할게."
"됐어 이 새끼야 넌 빠지고, 보컬한테 전화하라 해!"
전화를 끊고 시간이 좀 흘렀지만 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그렇고 그런 관계를 내가 눈치를 챘다 하더라도 그래서 웃었더라도 그게 잘못인 건가? 전화를 끊고 나서는 더욱 화가 났다. 그것은 나 자신의 화를 못 이겨서 제대로 된 반론을 펼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꽁지머리와의 기분 나쁜 대화 이후 며칠 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역시 꽁지머리다.
"어... 웬일이야."
"웬일은 형이 보컬이랑 얘기한다며... 보컬도 형 얘기를 듣고 싶어 해."
다시 열불이 났지만 침착해야 했다.
"참 내.... 그래? 알았어."
"오늘 저녁에 몇 시에 퇴근해? 일찍 끝나면 동암역에서 보자."
"그래 오늘 5시에 끝나니까 괜찮아,"
"그래 그럼 6시에 동암역에 있는 호프집에서 만나자구."
"알았다."
내가 왜 이런 일에 해명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어차피 얼굴을 보고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동암역에 있는 호프집은 오랜 된 인테리어도 한몫을 했지만 이른 저녁시간이었기에 손님도 없이 한가했다.
중앙 테이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창가를 기준으로 칸막이가 처져있는 전형적인 구닥다리 호프집이었다. 당연히 기쁘거나 가벼운 발걸음이 아닌 착잡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맥주 찌꺼기의 퀴퀴하고도 습한 기분 나쁜 냄새와 주인장이 식사를 가게에서 해결했는지 묘하고 매캐한 찌개 냄새까지 섞인 향내가 기분을 더욱 찝찝하게 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창가 쪽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꽁지머리와 보컬이 눈에 보였다. 잠깐의 눈 마주침 이었지만 보컬의 얼굴 표정이 첫 만남 때의 그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도시락 폭탄을 짊어지고 대단한 의거라도 하러 가는 의사의 표정 같은 결의마저 느껴지는듯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거리가 가까워지는 도중에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도 여전히 비장하면서도 싸늘한 표정과 눈 마침을 외면까지 하는 태도는 나를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어 왔어?"
반기는 건 꽁지머리뿐이었다.
나는 맞은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듯이 걸터앉으며 포기한듯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자... 그래 뭐가 문젠데?"
나의 말을 들은 보컬은 눈을 치켜뜨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한다. 역시 락 보컬다운 면모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아니 그렇게 가벼운 여자로 보였어요?"
예상한 질문이다.
나는 콧바람을 내쉬며 질문을 이어간다.
".... 내가 도대체 뭘 어쨌기에 그런 질문을 하지?"
"그날 밤 건너편에서 우리 둘을 보면서 비웃듯이 웃었잖아요!"
역시 예상한 대로 강한 어조로 취조하듯한 어투다.
"하하하... 정말 어이가 없네. 뭐 자격지심인 건가? 아니면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가?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그 능력은 형편이 없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어이없다는 내 태도에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을 원한다는 태도다. 상대방은 이미 나의 기분과 내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시팔 내가 우습게 보인 게 맞네... 내가 아니다 라고하면 믿을 건가?"
"그래 시팔 믿든 안 믿든 지껄여 보라구."
생각보다 보컬의 깡다구는 거칠었다. 자신이 믿는 것이 곧 정답이라는 태도다.
"내가 먼저 욕을 했으니 욕하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건너편에서 웃었다고 이렇게까지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오해하는 건 내가 해명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라는 거지? 내가 오해한 거다... 그런 거야?"
"말했듯이 내가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곳에 뭐 하러 시간 낭비하러 왔을까? 뭐 이 정도면 대충 대답이 안될까? 난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당신과 저 동생 놈이 웃길 뿐이야."
끝내 자신들의 듣고자 하는 대답 대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대하는 나에게 그들은 어느 정도 자신들이 지나치게 예민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는듯했다.
"좋아 내가 오해했다고 생각할게."
"잠깐 그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지?"
"그럼 뭘 어떻게 해줄까? 고개라도 숙여? 무릎이라도 꿇어?"
"그런 걸 시킨다고 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당신의 꼬인 마음은 당신이 알아서 하고, 미소 한번 지었다고 생사람을 잡는 바람에 짜증 난 내 기분은 어쩌면 좋을까?"
"에이 형 오해 같은데 기분 풀어... 응?"
"너도 이 새끼야! 중간에서 중재를 하던가 날 잘 아는 놈이 일이 이렇게 커지기 전에 말을 잘해야지! 강 건너 불구경이냐? 넌 어째서 그동안 달라진 게 하나도 없냐?"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컬이 한마디 한다.
"솔직히 두 번째 보는 거고, 그날 늦게까지 술도 많이 마셨고 또..."
"자신의 기분만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깔끔하게 사과는 죽어도 못한다는 거네?"
보컬의 말을 끊고 결말을 짓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래 알았어 좋아 미안해요 오빠. 솔직히 지금도 내키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거 아니라니까 믿을게요. 우리 술 한잔해요. 괜찮죠?"
어쨌든 억지라도 사과는 들은 셈이니 손해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아직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이 뭣 같은 상황을 잊을 만하게 오늘 하루 종일 먹고 죽을 만큼 술을사라.그리고나서 술 깨고 나서 판단하지... 그래도 답이 안 나오면 그냥 우리 인연은 쫑내는걸로하자구."
옹졸했지만 손윗사람이기에 내 자존심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테이블 위로 브루스 타가 올려지고 그 위로 얇은 냄비에 담긴 알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나는 뭔가 잘 안 풀리고 스트레스 받을 때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서 마시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도 여지가 없었다.
얼큰한 알탕에 빈 소주 병은 세병으로 늘어났고, 그다음 안주인 골뱅이무침에는 소주가 다시 두 병 더 추가되었다. 그 뒤로는 어느 누구도 정확한 술병 개수를 알지 못했다.
세 사람의 속마음은 그렇게 알코올로 마음을 다독였는지 풀어 버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새 밴드 얘기를 하고 있었으며 마무리 입가심을 하기 위해 편의점 바깥에 설치된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각자 캔맥주 하나씩을 앞에 두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밴드 이름이 뭐야?"
"아... 아직 말 안 했던가? 슬레이지 해머야."
"음....레파토리는?"
제법 술이 센 보컬이 캔맥주를 들이켠 후 오다리를 집어 들며 입을 연다.
"우린 판테라곡을해요...판테라곡 두 곡하고 자작곡이 있는데 아직 미완성이에요. 특히 베이스라인을 오빠가 마무리 좀 지어줘야 할 거예요."
"그래?판테라를 원키로 한다는 말은 들었어. 괜찮냐? 힘들지 않아?"
"뭐... 무리가 안되는 건 아닌데 괜찮아요."
"그럼 판테라는 그냥 듣고 따면 될 것 같고... 대신 튜닝은 정 튜닝이야? 다운 튜닝은 없지?"
그때 꽁지머리가 나선다.
"형 원래 우리곡중 5 Minutes Alone은 원래 6번 줄이 다운 튜닝이야. 그래야 사운드가 맛이 나거든... 근데 우리는 그냥 정 튜닝으로 해."
"알았어... 또 뭐 있어?
"Mouth For War."
"응... 그거 멋지더라! 역동적 이면서도 화끈하던데. 알았어... 자작곡은 베이스라인 언제까지 만들면 되냐?"
오다리를 오물거리면서 먹고 있던 보컬이 대답한다.
"어차피 요번 주는 호흡 맞추는 거니까 카피 먼저 하고, 다음 주 주말 합주 때까지 가능하겠어요?
"한번 해볼게... 그럼 너는 데모를 카피해서 보내주고 악보나 코드 라인이라도 먼저 보내줘. 가사나 작곡한 사람의 곡에 대한 의도까지 설명해 주면 더 좋고."
꽁지머리를 바라보며 주문을 하듯이 얘기를 하니 꽁지머리가 맥주를 들이켜는 도중에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자... 오빠 오늘 일은 잊을 순 없겠지만 더 이상 서로 거론하지 맙시다."
보컬이 캔맥주를 내게 들이밀며 건배를 제안한다.
"그래 알았어 이 까칠한 가시내야!"
"참내 오빠두 내가 뭐가 까칠하다구."
그렇게 셋은 캔맥주를 부딪치며 미래를 위한 다짐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캔맥주 한 캔씩을 더 마시고 술자리를 마친다. 편의점에서의 마지막 술자리를 마치고 일어서며 멀어지는 둘을 향해 바라보며 나는 큰소리를 지른다.
"야 시부랄놈의 락커들 조심히 들어가라! 주말에 보자!"
"그래 오빠도 조심히가!"
"그래 형 전화할게!"
오늘은 그 둘이 나에게 미소를 보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세 사람은 주먹 쥔 상태에서 검지와 새끼손가락만을 뻗은 락커들 특유의 싸인을 동시에 하늘로 치켜세우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