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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cker 18화.

18화 고통스러운 희열... 창작.

by 글싸라기


슬레이지 해머....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된 밴드. 지금까지 정통 락밴드의 베이스 플레이에서 벗어나야 했다.사운드도 거칠고 매우 근육질적 이다.곡 구성 자체도 뉴 메탈답게 정형화 돼있지 않은 점이 매력적 이었다. 마치 레드 제플린처럼 한 곡에서 다양한 리프와 변형된 리듬이 등장하는 편곡 방식과 닮아있다는 것이 매력적 이었으며 다행스러웠다. 더욱이 지미 페이지는 당시로서는 신기에 가까운 연주 기법과 마법 같은 기타톤이 특징이었다면,판테라의 기타리스트인 다임 백 대럴은 면도날 기타리스트라는 별명답게 날카로운 기타톤에 신들린듯한 리프 연주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판테라곡을 이어폰을 통하여 나의 두뇌세포에 각인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베이스는 락음악 특유의 거칠고 우렁찬 사운드라서 잘 들리지 않기에 볼륨을 10으로 해놓고 듣지 않으면 잘 안 들린다. 크게 듣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베이스는 베이스라인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밸런스와 강약의 흐름도 염두 해서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리듬악기와 멜로디악기의 중간 역할을 해야 하는 베이스 주자의 숙명이다.

퇴근길의 내 손에는 항상 소주 병이 들려져 있었다. 집중력에 도움이 되는 나만의 방식이었지만 취하면 오히려 독이 되었기에 항상 한 병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저녁식사 또한 안 먹거나 먹더라도 안주 자체가 식사 대용이 되도록 편의점용 훈제 닭 다리나 소시지 등으로 때웠다. 배가 부르면 늘어지게 되고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땀에 절어버린 몸을 샤워로 말끔히 씻어내고 소주 병을 따서 1/3만 따라서 마신다.그리고는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나온 갈색 빛깔의 윤기가 도는 넙적 닭 다리를 한 움큼 베어 문다. 은은한 훈제 향과 쫄깃한 육질에 침샘이 솟구친다. 그리고 이내 집중해서 카피할 곡을 닭고기를 씹듯이 잘근잘근 귓속으로 다져서 듣는다. 그 순간 낮에 그렇게 많이 들었던 부분인데도 안 들렸던 부분이 들린다.

"이런 이런..."

혼잣말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다시 리플레이 시키며 카피를 해낸다.

"아....패싱톤이었어!그래서 블루노트처럼 들렸구나."

카피를 하면서 고정 관념 때문에 단순한 이론을 잊어버린 결과다.

"패싱톤은 모든 라인을 구성하는 기본인데 왜 몰랐던 거지? 이런 바보야."

소주를 반쯤 마셨지만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검토를 한다. 역시 몇 개 놓친 것이 들린다.

"그렇지! 카피를 할 때나 연주를 할 때는 감정에 몰입하기 전에 이론에 기반한 채보와 철저한 연습이100%이상이 되어야해!그래야 실전에서 실수를 최소화한 연주가 가능하지..."

그렇게 발동이 걸린 나는 카피할 곡을 플레이와 스톱 그리고, 리와인드를 반복하면서 다시 수정 보완하며 철저히 채보해 나간다. 그동안 반쯤 뜯어먹은 닭 다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으며, 절반 정도 남은 소주도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소주를 사가지고 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필인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의 채보를 하고 난 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집중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밴드 자작곡의 베이스라인을 만들어서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집중하느라 앉은뱅이 자세에서 베이스 기타를 끌어안고 있다 보니 양쪽 발끝에 감각이 없어지고 목과 등허리가 뻐근하다 못해 통증이 심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못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으윽.... 아욱..... 으.."

좀비가 온몸을 뒤틀듯이 기괴한 모양새로 몸을 스트레칭해 준다.

"휴... 잠깐 쉬자 정말 잠깐.."

담배를 입에 물고 힘껏 빨아당긴다.그리고는 천정을 향해서 길게 내뿜는다. 로켓 추진채처럼 힘껏 뻗어 나가는 담배연기가 천정에 매달린 동그란 전등 주변에 닿자마자 사방으로 퍼져버린다. 정말 이 담배만 피우고 바로 작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집중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둘째치고 다시 집중이 안 되면 오늘 하루는 그냥 날려버릴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꽁지머리의 리프로 구성된 첫 자작곡... 상당히 프로그레시브적이다. 난감하다. 일반적인 락 베이스 형태의 근음라인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 이런 곡에는 베이스도 마치 세컨드 기타처럼 기타와 화음을 이뤄주는 라인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기타와 전혀 다른 라인으로 진행하더라도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형태여야 한다. 대위법 같은 형태처럼...

깊은 고민이 점점 체력을 고갈 시킨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다. 안되겠다 좀 걸어야겠다.늦은 밤 운동화를 신고 길거리를 나선다. 저녁식사를 하느라 골목으로 퍼져 나오는 김치찌개 냄새가 정겹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듯한 어느 집 마당의 강아지가 목이 쉬어라 짖어댄다. 날파리가 마치 안개꽃 같은 느낌을 주는 가로등이 한 송이 야화 같다. 어느 호프집 앞에서는 이미 한껏 취한 채로 심각한 대화를 어깨동무까지 하며 귓속말을 하는 두 아저씨들...

언제나 어디서나 흔히 느낄 수 있는 골목 풍경이다. 그렇게 골목의 냄새와 풍경을 느끼며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고 또 걸어갔다. 지금까지 열심히 그렸던 그림을 찢어버리는 화가처럼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든 도자기를 과감히 깨부수는 도자기 장인처럼 머릿속을 씻어내고 있었다. 억지로 쥐어짜내면 오히려 힘만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멜로디도 아니고 리듬도 아니고 라인도 아니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어떤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맞다. 이거다!"

정확한 베이스 라인이 생각난 건 아니었지만, 떠오른 그 장면을 계속 집중하면 라인이 생각날 것 같았다.

"그래그래.... 이래서 가사가 필요한 거야!"

카피를 할 때나 자작곡에 라인을 만들 때 나는 늘 가사와 더불어 반드시 작곡자의 의도나 곡이 만들어지게 된 스토리까지 요구한 이유가 바로 이것 이었다. 그 느낌을 알아야 그것과 흡사한 느낌의 라인을 만들 수가 있고, 연주가 가능하고 믿었던 내 나름대로의 음악적 철학이었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뛰다시피 집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아차차 하면서 다시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고, 손에는 소주 병이 들려있었다. 이 시점에서 나에게 술은 마중물 같은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식어버린 소주 병은 뒤로하고 새로 사 온 소주 병을 절반 가까이 들이켠 후 하고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를 끌어안고서 보물을 찾는 후크선장처럼 지판을 이리저리 누비며 흩어져있는 음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드디어...

'반짝' '반짝'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며 나는 반짝이는 보석들을 오선지에 가지런히 뿌려놓는다.

"그래그래 글리스와 밴딩이야.... 기타만 초킹을 하란 법은 없지... 이 라인에 이펙터를 쓰면 원석을 다듬어놓은 보석처럼 될 거야!"

키보드로 찍은 기본 드럼라인에 기타 리프와 코드 워킹만 들어있는 데모곡을 틀어놓고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번개같이 채보해놓은 베이스라인을 떠올리며 머릿속에서 합주를 해본다.

"이거다....!좋다! 적어도 내 맘에는 든다!"

갓난아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이 이럴까?

너무 이쁘다... 내 속에서 이런 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나머지 남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어 버린다. 술맛이 참 달디 달다.널부러진 악보들 지웠다 다시 쓴 흔적들의 지우개 가루들 그리고, 닭고기 조각과 소주 병들....

주변은 온통 엉망진창인데 오선지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과연 이것을 동생들에게 들려주면 뭐라고 할까. 기대도 됐지만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이날 저녁만큼은 행복했고,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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