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기회.
우리는 평일 하루와 주말과 휴일에 모여서 자작곡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와 합주를 하며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야말로 모두들 끝장을 보자는 독기 같은 열정이 활활 타올랐다. 그것은 쉬는 시간이 다른 어느 때와 달리 짧아진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 한 잔에 담배 한 대 정도만 피우고는 곧장 합주실에 모여들었으니 말이다.레파토리는 쌓여갔고, 자작곡도 두 곡, 세곡, 네 곡.... 앨범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녹음은 장비를 직접 사서 녹음을 하고 믹싱이랑 마스터링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때 내 생각이?"
꽁지머리의 제안을 듣고 있던 멤버들은 긍정적이었으나 우리에게 제일 치명적인 단점인 경제적인 문제를 보컬이지적했다.
"우리가 하든 맡기든 다 좋은데 문제는 돈이지 뭐... 장비 문제도 얼마짜리를 사느냐가 퀄리티를 좌우할 텐데, 괜히 돈만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보컬의 우려스러운 답변에 꽁지머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한다.
"그래서 알아봤는데 기타 더빙으로 두 채널 보컬 한 채널 베이스 한 채널 드럼 한 채널... 해서.... 다섯 채널인데 여분으로 생각해서도 8채널에서 10채널짜리 일본 제품 알아보니 홈레코딩으로 40만 원 선이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머지 장비는 합주실에 다 있으니 합주실에서 해결하면 될 것 같고... 녹음 때 쓸 마이크나 나머지 잡비 생각해도 내 생각에는 80만 원 선이면 당장 급한 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 인당 20만 원 각출하면 가능해."
누군가에겐 작은 돈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큰 돈일 수 있는 금액이었다. 특히 멤버 대부분이 직장인이었기에 빠듯한 급여 생활자들에게 20만 원이란 돈은 쉽지 않은 숫자였다. 자세한 금액과 내용까지 알아온 꽁지머리의 긍정적인 제안에 금액이 부담 간다고 나무라지도 못하고 멤버들은 잠시 동안 침묵 속에서 각자 20만 원에 대한 고민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이때 드러머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웃자고 농담을 꺼낸다.
"아... 이럴 때 로또라도 당첨되면 좋겠다."
"로또 되면 녹음실을 제대로 멋지게 꾸미자."
보컬이 웃으며 대답했다.
"난 잭 와일드 시그니처..."
꽁지머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참내 딴따라들 아니랄까 봐 전부 악기랑 장비 얘기 군."
나의 한마디에 다들 작은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자자 그럼 다들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준비들 하셔! 언제까지 가능들한 거야?"
다시 잠시 침묵을 이어가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일단 다음 달 월급 나오면 줄 수 있다."
"나도."
"그래 다음 달에 준비하자 당장은 다들 힘든것 같으니..."
드럼과 보컬의 동조에 결정은 났다.
"그래 그럼... 다음 달에 준비되는 대로 내가 구해올게. 그때까지 나머지 미완성인 곡들 마무리나 해놓자구!"
"오케이!"
"좋아 드디어 우리만의 작업실이 생기는 것인가?"
결정을 짓고 나니 모두들 우리만의 녹음실이 생긴다는 것에 분위기가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인천 클럽과 홍대 클럽에서 공연을 이어갔다. 매주 합주와 공연이 이어지다 보니 슬레이지 해머의 호흡과 연주력은 나날이 상승했다. 그것은 공연 때 팔짱을 끼고 듣거나 아니면 외면하던 관중들이 대부분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하나둘씩 손을 들어서 환호를 하더니 급기야 우리가 연주할 때면 알록달록한 무대조명을 받으며 헤드뱅잉까지 하는 관중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번 주 드디어 녹음이야.."
무대에서 내려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멤버들에게 다가온 꽁지머리가 느닷없이 툭 하고 내뱉는다.
"벌써 그렇게 됐냐?"
내가 놀란 눈으로 대답하자 꽁지머리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지? 시간 빠르네... 장비는 주말에 맞춰서 가져올 거야. 세팅하고 바로 테스트 들어가 보자구."
다들 서로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도 이대로 넘어갈 수 있나 한잔 콜?"
나의 들뜬 제안에 모두들 반기는 표정이었다.
"주말에 녹음도 해야 하고 바쁘니까 오늘이 좋겠네."
"그동안 제대로 못 마셨는데 오늘 좀 달려볼까?"
"오케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을 빠져나가려 하자 일부 관객들이 악수도 청하고 자작곡 멋지다고 칭찬도 하는 격려 속에서 화답을 하며 마치 인기 연예인이라도 된듯한 착각까지 하며 기분 좋게 문 앞에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음악 좋았어요 신선하고 힘이 느껴지는 락음악."
빛바랜 검은색 라이더 재킷에 블랙진을 입고 구두는 굽이 높은 카우보이 장화를 신은 사람. 나이는 어림잡아 50대는 되어 보이는데 마치 락커같은 분위기, 나이에 비해 오히려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는 중년 남자가 문 앞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칭찬같은 감상평과 함께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아 네... 뭐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고는 가벼운 미소로 응대하고 문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 중년 남자가 다시 앞을 가로막으며 명함을 내민다."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명함에는 "J 엔터테인먼트"라고 적혀있었고 실장이라는 직함까지 적혀있기에 직감적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본 나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멤버들에게 돌아서서 마치 투수를 강판할 때 투수에게 몰려든 감독과 코치처럼 둥그렇게 모였다.
"저분이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잠시 시간 되냐는 데? 기획사에서 나온 사람 같아."
기획사라는 말에 보컬이 먼저 미소를 띠었다.
"와 오빠 우리 스카웃?"
"에이 그럴 리가 아마추어인데... 일단 얘기나 들어볼까?"
나의 제지에 보컬은 심드렁해졌지만 이내 궁금함에 고개를 삐죽 내밀며 중년 남자를 어깨너머로 훑어보며 말한다.
"그래 오빠 손해 볼 건 없잖아. 같이 가자고 해요."
"우리 술자리에? 초면에 술자리는...."
"뭐 어때요 우리에 맞추는 거지 시간도 없고..."
"그래 형... 편하게 얘기해 봐요."
"알았어.."
자리를 옮기는 것도 우리가 마침 회식을 하기 위해서 술집으로 가려 해서 합석을 하자는 것도 모두 흔쾌히 받아주었기에 같이 술집으로 이동을 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보컬은 혼자만의 상상 회로를 돌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인디밴드처럼 클럽에서만 공연하는 연주자들은 메이저 기획사에서 눈길을 받을 일이 거의 희박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간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일임에 분명했다.평소에 자주 가는 삼겹살집에 모인 우리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실장이라는 중년 남자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는 꽁지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삼겹살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멤버들은 형식적인 인사치레 같은 말 다음에 나올 다음 얘기를 기대하며 보채는듯한 표정으로 간결하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라고 부탁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겹살을 뒤집던 꽁지머리마저 중년 남자의 이어지는 말에 뒤집던 고기를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참 인상적인 음악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초면에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개성이 강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느껴집니다. 물론 대중성이 약하긴 합니다만..."
대중성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 인디밴드에게는 무척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이다. 인디밴드의 가치는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기에 멤버들의 얼굴빛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보컬과 드러머는 표정이 좋지가 않다. 나는 마치 소개를 주도한 중매쟁이의 심정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그 순간 보컬이 참지 못하고 소주잔을 들어서 입안에 털어버리고 한마디 한다.
"죄송하지만 대중성을 말씀하시려면 잘못 오신 거 같네요."
보컬의 저돌적인 표정과 행동을 지켜보던 중년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한다.
"네 알고 있어요! 클럽에서 공연하시는 밴드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하지만 끝까지 한번 들어보시겠어요?그리고나서 판단하셔도 안 늦을 것 같은데..."
차분하고도 단호한 어투에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일단은 들어보자는 눈짓을 멤버들에게 보내면서 중년 남자에게 독촉한다.
"네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
"음악에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만 손보면 대중적으로도 인정받을만한 여지도 있습니다."
중년 남자는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한번 더 언급하며 보컬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말을 이어간다.
"여러분께서 동의만 하신다면 모든 지원은 저희 기획사에서 지원해 드릴 것입니다. 앨범 제작부터 홍보까지 물론 공연 스케줄도 저희가 맡아서 해드리구요 전담 매니저와 공중파 출연까지도요.물론 계약서를 써야겠지요."
앨범제작.홍보.공연.매니저.공중파....낯설면서도 믿기지 않은 단어들에 나는 물론 멤버들은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역시 보컬은 남달랐다.
"담배 피워도 되죠?"
"아.. 물론.."
보컬의 당돌한 예의를 중년 남자는 배려로 답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후 하고 연기를 내뿜던 보컬이 강한 어조로 질문을 한다.
"우리는 아무리 없어도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큽니다. 기획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음악을 대변해 줄 수 있을까요? 단순히 인기를 얻고 돈 벌기 위한 포장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다른 멤버들의 질문을 대신해 주는 녀석이 고맙기까지 했기에 대답을 듣기 위해 중년 남자에게로 시선이 쏠렸다.중년 남자는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팔짱을 끼고서는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더니 둥그런 테이블에 있는 반찬들을 바라보며 오히려 질문으로 대답을 한다.
"멋쟁이 보컬분 역시 매력적인 질문을 하시네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현재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락커들의 모습들... 진짜 만들어진 게 아닐까요?"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우리는 평소 전설과도 같은 슈퍼밴드들의 락커들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마치 그런 것들을 한 번에 부정하는듯한 말투. 게다가 강한 자신감까지....
"슬레지 해 머...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무엇을 하든 간에... 중요한 건 여러분들은 대중음악을 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중요한 건 대중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중요한 건 바로 그겁니다. 인정을 받고 난 뒤에 하고 싶은 음악을 해서 자신들만의 깊이와 가치관을 주장해야 해요 그러면 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본인 것을 주장한다면 누가 들어줄까요? 더욱이 우리나라는 락의 불모지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랩이나 댄스음악이 대세인 시대죠. 레드제플린. 오아시스. 밥 딜런 등등 모두 태어날 때부터 인정을 받았을까요? 아무런 외부에 도움도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 현실의 공백은 기획사가 해야 할 일이구요.답이 됐을까요?
중년 남자는 말을 마치고 앞에 있던 술잔을 비웠다.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장 계약을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도 당연히 투자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좀 더 모니터링과 대화를 필요로하구요."
중년 남자는 말을 마무리하고는 삼겹살 한 점을 쌈에 싸더니 자연스럽게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멤버들을 슥 하고 둘러보았다. 너희들 정도는 도울 수 있어 라고 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아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모습의 보컬이 한 번 더 나섰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정도가 된다는 말씀인가요? 믿어도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꼿꼿한 자세에서 나오는 그녀만의 확인사살이었다.
"그렇죠...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죠. 사기꾼들도 많으니... 저는 오늘만 여러분을 본 게 아닙니다. 한 달 정도 됩니다. 자작곡을 우연히 들은 후 부 터니까요. 남다르다는 것은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다른 밴드들처럼 기타가 속주에만 집중하지 않고 절제하는 연주가 좋았으며, 특히 베이스라인이 특이 했어요. 락에는 장르가 많은데 새로 생긴 장르라고 해도 될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보컬이 여성분이신데 남자 못지않은 성량과 거친 톤이 매력적 이었습니다. 이렇게 남다른 세 가지만의 굵직한 장점이자 매력만으로도 제게는 어필이 되었습니다. 답이 됐을까요?"
중년 남자는 단호했고 얼굴의 미소 또한 근엄했다.
짧은 몇 분 동안 건배 없이 각자 술을 들이켜고 타버리기 일보 직전인 삼겹살을 쌈에 싸서 입에 밀어 넣기만 했다.그런 멤버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마치 종례 때 담임선생님과 같은 자세와 톤으로 마무리 발언을 한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실 것 같고요... 어쨌든 이런 분위기 참 좋네요. 보통 명함을 드리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를 먼저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래도 제가 제대로 된 음악인들을 만난 것 같아서 오히려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헤어짐을 알림에 내가 나서서 인사로 마무리한다.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저희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중년 남자에게 머리까지 살짝 조아리니 보컬은 무얼 그렇게까지 하냐는 시늉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내색을 한다.그 모습을 보며 중년 남자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한다.
"아녜요... 좋아요 그런 자존감! 보컬분 물건이시네요 하하하... 모쪼록 나중에 크게 성공하셔도 오늘의 그런 마인드를 부디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반가웠어요. 연락 주세요 그럼 이만..."
모두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가벼운 목례로 마중을 대신하지만 보컬은 앉은 채로 겨우 목례만 하는 우리를 뒤로하고 중년 남자는 술집을 나선다.자리에 앉은 내가 먼저 말을 한다.
"우리 여기 말고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요 다른데 가요."
보컬은 할 말이 많은가 보다. 빨리 다른데 가자고 조르는 보컬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운터로 향한다. 계산을 하기 위해 가게 주인을 부르자 주인은 멀찌감치 반찬을 나르면서 외친다.
"아까 먼저 나간 양반이 계산하고 갔어요!"
우리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로 마주 보았지만,서둘러 긴급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하여 가까운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