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 글쓰기
술김에 평소 못했던 말을 내뱉는 것을 일명 ‘취중 진담’이라고 한다.
이는 알코올이 대뇌 피질의 억제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인데, 평소 꾹꾹 조심히 담아놨던 생각의 끈을 조절하는 중추가 일시적으로 느슨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어떻게 변하는지 많이 봤다.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그 사람이 더 좋아진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취중에 드러나는 것이 누군가의 감춰진 속마음이라면, 나는 늘 거친 속마음보단 잘 정돈되고 억제된 겉모습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흐트러진 모습보다는 정돈된 모습에서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인가 보다.
아, 그러고 보니 딱 한번 있다.
내가 몹시 좋아한 사람이 술이 잔뜩 취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했다.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만큼 취한 그는, 나에 대한 자신의 혼란한 마음들을 털어놓았다. 송곳처럼 심장을 후벼 파는 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싶은 변태적인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취중 진실된 모습으로 누군가가 더 좋아진 적은 없다.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인데, 술만 안 마시면...”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빼빼 마르시고 눈이 한국인답지 않게 크고 푸른색이었다. 술을 마시면 할아버지는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 담아놓은 생각들을 폭탄처럼 터뜨렸고, 거기에 폭력이 더해지며 집은 전쟁터가 되곤 했다. 우리나라 명절엔 술이 빠질 수 없고, 그러므로 한 번도 빠짐없이 명절은 아수라장으로 마무리되었다. 폭력과 눈물과 비명이 뒤범벅된 아수라장.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생각했다. 나는 그때 술을 마시고 하는 말들과 행동은 진심이 아니라고 믿었다. 알코올이 다른 인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그저 조절기능만을 상실하게 하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에 취하지 않은 할아버지랑은 잘 지냈다. 나를 제외하고는 우리 집 사람들은 누구도 할아버지랑 제대로 말을 섞어 주지 않았다.
인색한 할아버지는 절대 자신이 술값을 내는 경우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랄까, 나를 보면 든든해하셨다. 공부를 잘하는 내가 장차 돈을 많이 벌어와서 부모님을 먹여 살리라고, 그것이 효도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자기 자식들을 향한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삼대독자여서 귀하게 크시고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오래 하셨던 할아버지는 내게 공자 맹자 성현들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부모의 능력이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효자가 아니라는 말씀 역시 할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이 역시 사실은 자기 자식들을 향한, 굴절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을까 착한 사람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소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제대로 할 말을 못 하는.
사실 할아버지가 술 취해서 하는 말들은 거의 다 옳은 말들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자식들과 아내에게 그것은 참된 사랑과 효가 아니라고, 능력에 상관없이 남편을, 아버지를 존중하라고 말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말들을 혀가 꼬인 채로 내뱉으니, 옳게 들어주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겠지. 할아버지가 진심을 말하기 위해 열심히 마셨던 술은 할아버지의 위 점막을 녹이고 녹여 암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나중엔 식도까지 막아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조차 없었다. 평생 술을 빌려 진심을 이야기하셨던 할아버지는 위암 4기로 진단받고 나서야 비로소 술을 끊으셨다.
소주는 마시지도 못하지만, 종종 편의점서 소주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흐릿하게 푸른 눈과, 술이 없으면 꺼내지 못했던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이 불러왔던 비극까지. 할아버지가 조금만 더 씩씩한 사람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할아버지를 많이 좋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