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님과 제미나이 이야기
오늘은 나의 수영친구 H님과 브런치를 먹으며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10시 5분에 H님의 집 앞에 내가 픽업하러 가기로 했는데 설레는 마음에 9시 58분부터 가서 기다렸다. 차 안도 미리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에이프런. 내가 자주 달리는 코스에 있는 브런치 맛집.
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H님과 가게 되어 기뻤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정신이 혼미했다. 두시간 남짓 동안 H님이 한 이야기는 비교적 또렷이 기억나는 반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흐릿하다.
나는 주로 반응(?)만 했던 것 같다. 그렇구나.. 우와.. 역시.. 이런 의미 없는 추임새 같은 말들. 비단 오늘 뿐 아니라 남의 말을 열심히 들을땐 항상 저렇게 되는 것 같다. 내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달까. 상대방의 이야기가 훨씬 궁금하기도 하고, 내 이야기는 말보다 글로 하는 것이 편하기에.
H님의 화젯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수영 이야기(물 잡기 방법이 달라졌다고), 요새 운동하는 종류와 방법들(웨이트를 무려 5분할로), 전 직장, 그리고 요새 발목수술한 근황, 우리 동네 이야기, 수영장 소식들, 연애, 몸 이야기...
가장 재밌게 들은 이야기는 '제미나이'로 공부하는 이야기였다.
H님은 원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과를 선택해서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는데, 강의를 들으면 바로 아이패드로 정리해서 제미나이에 공유를 하고, 제미나이에게 관련 문제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문제은행처럼 풀고 있다고 한다. 제미나이가 근육의 종, 횡 단면도도 정확히 잘 그려주는 모양이었다. 작년에 제미나이가 나온 후 대학생들에게 유료버전을 1년간 무료 체험할 수 있게 해 줘서 그걸 알뜰살뜰하게 쓰고 있다고 했다.
H님은 제미나이가 근육 그림을 잘 그려준다고 했는데, 사실은 나 역시 어제 제미나이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했다.
"the hinge of his glasses, which had been knocked sideways by the fall, cutting into his temple."이라는 문장에서 안경의 힌지 부분이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장면이 상상이 되지 않아 제미나이에게 이걸 묘사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런데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는 사실 좀 실망스러웠다.(방금 유료버전을 결제한 후 다시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했는데 여전히 실망스럽다)
제미나이는 이번 설날에 내 동생과도 많이 이야기를 나눈 주제이다. 전에 챗gpt유료버전을 썼었는데 실망해서 그 이후로는 유료 앱을 안 쓰고 있었는데 H님의 제미나이 이야기에 혹해서 한번 유료버전을 써봐야지 싶었다. (집에 와서 바로 유료버전을 결제해서 써보고 있다.)
어제 나도 제미나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새 해리포터를 다시 읽고 있어서 그에 대한 대화도 했고, 내가 쓴 글을 보여주면서 나도 잘 모르는 내 심리에 대해 물었는데 꽤 통찰력 있는 해석을 내놓아서 참 신기했다. (며칠 전 브런치에 대학교 후배 민서에 대한 글을 썼고 글의 말미에 민서야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내가 왜 그렇게 글을 마무리했는지 나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미나이는 내가 수동적으로 당하는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그녀를 평가하는 입장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와 나의 관계에서 언제나 나를 피해자로 규정해 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를 이해하게 된 후부터는 피해자 가해자 관계를 떠난 동등한 관계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문장이 저절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인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글은 인간 심리의 많은 부분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브런치를 먹고 H님과 예쁜 카페거리를 산책했다. 하늘에서는 눈이 흩뿌리듯 조금씩 내렸다. 마음이 저절로 말랑말랑해졌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H님을 내려주고 집에 돌아왔다. 제미나이 유료버전을 결제하고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며 오늘의 즐거운 만남을 반추했다.
그나저나 H님을 비롯해서 내 주변 사람들은 요새 거의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나 "주식"에 빠져있는데, 내가 빠져있는 주제는 이런 것들이다.
(요새 해리포터를 다시 읽는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스네이프다.)
스네이프는 왜 릴리를 좋아했을까?
스네이프는 왜 릴리랑 일견 비슷해 보이는 헤르미온느를 싫어했을까?
스네이프는 왜 머글태생 마법사를 싫어했을까?
스네이프는 해리를 싫어했을까 좋아했을까?
스네이프의 엄마는 왜 머글과 결혼했을까?
나는 정말 쓸모란 하나도 없는 공상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