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쓰기
2049년 1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 정서고고학 연구실.
미오는 유리 진열장 안 30cm 남짓한 백자 항아리를 바라본다. 소박한 흰 바탕 위에 푸른 덩굴이 연꽃 한 송이를 감싸고 있다. 근대기 황해도 일대에서 제작된 청화백자, 일명 해주항아리. 수집 장소는 부산. 150년이 넘는 세월과 긴 이동 거리를 온전히 견뎌낸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항아리가 특별한 이유는 정서고고학적 분석 결과, 복합감정 밀도가 1등급으로 판정되었다는 데 있었다.
정서 결정체 농도 98.4%, 복합감정 밀도 1등급. 정서 크로마토그래피 분석 결과 설렘과 그리움, 서러움과 미안함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정서 결정체는 시간의 나이테만큼 켜켜이 쌓인 퇴적 구조였다. 이는 누군가 오랜 시간 감정을 부어 넣었음을 의미했다.
미오는 감정스캔 장갑을 끼고 항아리를 어루만진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백자, 그 이면에 스며든 감정의 잔향이 미세하게 전해진다. 바람결에 스치는 냄새 같기도, 낮은 흥얼거림 같기도 한 그것은 미세하게 진동하며, 손끝에서 머리로, 다시 가슴으로 번진다. 언어보다 깊숙이 파고드는 떨림. 미오는 그것을 ‘영혼의 진동’이라 불렀다.
정서 데이터를 영상 재구성 프로그램에 입력하자 홀로그램 영상이 떠오른다.
부산 동구 초량동. 일명 168계단이 가파르게 펼쳐지고, 양쪽으로 피란민들이 지어놓은 판잣집들이 즐비하다. 소년이 해주항아리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계단 끝에서, 삶이 고단해 보이는 한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은 말없이 항아리를 내민다. 소녀는 한참 바라만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 순간, 소년의 표정이 무너진다. 그는 항아리를 소녀의 집 계단 옆 틈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는 힘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영상 끊김. 소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된장이 든 항아리를 발견하고, 소녀를 호되게 나무란다. 억울한 표정으로 울음을 삼키는 소녀. 다시 영상 끊김. 후회와 미안함으로 항아리를 응시하는 소년의 무거운 눈.
이튿날, 미오는 직접 168계단을 찾았다. 영상 속 틈새와 정확히 일치하는 자리. 감정스캔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언저리를 더듬자 익숙한 진동이 다시금 전해진다. 어떤 감정은 휘발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속에서 더 깊이 스민다. 그날 소년의 감정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정서고고학은 AI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신생 학문이다. 인류가 AI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하며, AI는 방대한 양의 감정 데이터를 축적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감정과 그에 얽힌 기억까지 스캔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렬하고 지속적인 감정은 사물에 스민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고고학은 감정과 기억의 복원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서 데이터로 재구성된 기억은 파편적이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고도의 정서 지능과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AI는 아직 인간을 따라오지 못한다. 사물에 깃든 감정과 기억을 바탕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하는 것, 그것이 정서고고학자들의 역할이다.
내년은 한국전쟁 100주년. 국가에서는 이에 맞춰 전쟁 정서기억 유산을 정리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미오는 국립중앙박물관 책임 연구원으로서 부산의 ‘임시수도 정서기록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참여중이다.
드디어 2050년 6월 25일. <6.25 100주년, 전쟁과 피란-살아있는 역사> 전시회. 관람객들은 머리띠 형태의 감정 수신기와 특수 고글을 쓰고 유물에 깃든 기억과 감정을 직접 체험한다. 관람객들이 해주 항아리에 담긴, 1950년에 10살이었던 김한수 씨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사로 밝혀진 이야기가 오디오로 흘러나온다. 개성에서 정미소를 하던 김한수 씨의 가족은 부산까지 피란을 와, 168계단 옆 판잣집에 자리를 잡았다. 항아리는 갖은 풍파에도 부산까지 짊어지고 온 어머니의 소중한 혼수품이었다. 그 안에 스민 것은 천막으로 지어진 피란 학교에서 만난, 된장국조차 먹을 형편이 안 되던 한 여학생과의 기억. 집에서 몰래 된장을 퍼다 예쁜 항아리에 담아 나누고 싶었던 철없던 소년. 그리고 차마 그것을 받지 못했던, 오히려 억울하게 혼이 났던 자존심 강한 소녀의 모습이 고글 안에 펼쳐진다. 감정 수신기를 쓴 관람객들의 마음은 소년과 소녀의 선명한 감정으로 저릿하다. 이미 고인이 된 김한수씨의 기억은 촘촘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그 파편 위에 상상력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그려본다. 노인이 되어서까지 잊지 못하고 항아리처럼 오래 품어온 마음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다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는 침묵 속에서 부푼다.
미오는 항아리와 관람객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켜켜이 쌓인 감정과 시간의 부피가 언젠가 그것을 꺼내 읽는 누군가의 손끝에 닿아, 마침내 울림이 되고 울음이 되는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