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개양이다 I am CATOG

존재감을 드러내다.

by 개양이 CATOG

https://www.youtube.com/watch?v=dmalek70unc

Identity Reconstruction 정체성 재건축, 2018, Video


2018년 어느 날, 커뮤니티의 소식란에 광고가 하나 올라왔다. 토론토의 한 아파트가, 도시 재 건축으로 곧 폭파될 예정이라는 것. 아파트가 폭파되기 전, 토론토에 있는 아티스트들이 함께 모여 게릴라 페인팅 협업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갔다. 룰은 간단했다. 건물 빈 벽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되, 상대방의 그림을 완전히 지우거나 덮지 않고, 오직, 더해가며 그리기. 토론토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잔뜩 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작업을 보여주며 은근한 기싸움이 오고 갔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져간 검정 페인트 한 통으로 빠른 스피드로, 벽에 개양이를 그렸고, 문구를 적었다.


Are you a Cat person or a dog person? I am CATOG.

당신은 고양잇과? 아니면 개과? 나는 개양이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한 아티스트가 말을 걸었다.

‘Can I mess it up?”

장난 좀 쳐도 돼?


“What do you mean by mess it up?”

장난친다는 게 어떤 건데?


“If I say mess it up, I literally meant mess it up.”

내가 장난친다 했으면, 진짜 장난친다는 거야.


그리고 내 그림에 장난을 치겠다고 했다. 장난을 허락했다. 그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시작으로 수 백명의 아티스트, 지나가는 관람객들까지 내 그림에 무언가를 더하기 시작했다. 색을 칠하기도, 무늬를 더하기도,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변주에 신이 나서 그림에 계속 밀도를 더했다.

Screen Shot 2019-06-05 at 9.50.43 AM.png
Screen Shot 2019-06-05 at 9.50.15 AM.png

센스 넘치는 어떤 한 아티스트는 이런 그림을 더하기도 했다.


'Not a cat person'

나는 고양이과가 아니에요



밤이 되자, 야광 물감을 더하기 시작했고, 야광 라이트의 빛을 받아 존재감을 더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뮤지션들도 오기 시작했다. DJ, 바이올리니스트, 젬배 아티스트. 그들의 즉흥 연주 음악의 기운을 주고받으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내려놓고, 젬배 연주에 합류했다.


Screen Shot 2019-06-05 at 9.55.04 AM.png


'덩덕덕 쿵더쿵'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휘모리 장구 가락이 여기서 쓰일 줄이야. 아프리카 전통악기인 젬베의 박자를 휘모리장단으로 받아치자 연주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이런 게 '신명'이라는 걸까? 소름이 돋았다.


Screen Shot 2019-06-05 at 9.55.28 AM.png
Screen Shot 2019-06-05 at 9.55.50 AM.png

끊임없이 음악가들과 페인터들이 이 공간을 가득 매우는 2주일의 시간동안, 나의 정체성의 상징인 개양이는 가득 채움과 진화를 경험했다.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개의 집단에, 고양이의 집단에 완벽하게 소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보다는, 둘 다 일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기. 건강한 자존감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 힘을 스스로 인정하고,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경계를 스스로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열어놓는 상태인 것 같다. 스스로의 고유한 중심은, 바뀌지 않기에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되 그 중심부의 주변은 말랑말랑하고 유연하게 열어놓기. 내 주변의 사람, 환경에 곁을 주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함이다. 함께 어울려 논다는 것은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익명의 어떤이가 마지막으로 개양이의 몸통에 크게

'HEAL (치유하다)'

라는 글자를 남기고 갔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흥겹게 놀았던 축제의 현장에서, 누군가 내 그림의 방향성을 읽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

.

.

쾅!



약속된 2주의 시간 후 건물은 폭파되어 이 해프닝의 흔적은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함께 어울려 가득 채움과 진화를 경험한 나의 정체성은 완벽한 비움을 경험한다.


완벽하게 채우고 완벽하게 비워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재건축할 수 있을 듯 했다.

이제 또 한 번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keyword
이전 15화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