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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는 것

'승리'를 새로이 정의하다.

by 개양이 CATOG

'승리'라는 단어는 단어 자체로 찬란하다. 멋져 보인다. 대중매체는, 그리고 사회는 이상적인 승리에 대해 비교적 고정적으로 정의한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여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열광하고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리고 암암리에 말한다.


"저렇게 멋진 사람을 봐."

"너도 지금 힘들지만, 극복해."

"이겨내. 할 수 있어."


그러나, 이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왜? 극복이 불가능한 어떤 상황이나, 난제를 만났을 때, 그러한 틀은, 극복이 불가능한 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폐배자라고, 무능력하다고 암암리에 낙인찍는다.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니며 Extraordinary Body(비범한 몸)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멋진 스승을 만난 적이 있다. 이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타고난 사람이었고, 그녀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평생 걸을 수 없을 것이고, 아기를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녀는 휠체어를 자신의 신체 일부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태어나자마자 난제를 만난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과제를 해결해 나가기도 버거운데, 사람들은 그녀가 현재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폭력을 범한다고 말한다.


Norm(정상)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왜? Abnormal(비정상)이라는 개념을 구분 짓기 때문이다. 정상은 무엇인가? 누가 정상을 정의하는가? 나는 정상인가? 아니면 비정상인가? '정상'이라는 단어는 '틀 frame'에 불과하다. 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어온다면, 옳은 것이고, 그 밖에 다른 범주에 속하면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그저, 다른 것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녀는 오늘, 여기,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것인지 이야기한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말해주기로 한다.


불완전한 마음으로 이만큼 살아낸 것이 대단해.

누군가를 이기지 않아도 좋아.

극복하지 않아도, 극복하지 못해도 좋아.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너는 승리를 쟁취했어.

잘했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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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Yellow, Brown, Weird, and Black CATOG 백, 황, 갈, 이상한, 흑 개양이 , acrylic on canvas, 80cm x 1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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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OG 1 개양이 1, acrylic on canvas, 80cm X 135cm, 2010


새샹에는 개, 고양이, 개양이, 셋다 아닌 어떤 사람도 존재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영롱하게 빛나는 이상한 개양이다.

더 이상, 어두움 속에서 움츠려 들어 고유한 색을 감추지 않는다.

더 이상, 개의 집단에 속할지, 고양이의 집단에 속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서로의 방식대로 고유한 공놀이를 즐기며, 서로 다른 개체 외 함께 있을 때에 다양성을 더한다.


캐나다가 나에게 준 선물은 고유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다. 흔히들, 미국과 캐나다의 문화는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캐나다만의 독특한 문화적 관점이 존재한다. 미국은 Melting Pot (끓는 용광로)의 문화로,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에 넣고 끓여서, 미국적인 것을 만들어낸다. 캐나다는, Mosaic 모자이크의 문화로, 고유의 문화적 배경을 존중하고 어우러져있는 문화적 모자이크를 지향한다. 개체로 있을 때 고유하게 아름다운, 그러나 모여있을 때 그 다양성의 스팩트럼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어떤 틀에 스스로를 집어넣기 바빠서, 스스로의 '이상하다'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주저했던 과거의 나에게, 또 한 번 성장의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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