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더 나은 삶에 관하여
30년 인생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깊게 묵상한 적이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5살 때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천국(하나님 나라)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당연히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5살 때 묵상한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과정 정도로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가장 담대했던 시기인 거 같다.
두 번째는 21살 때다. 당시 나는 많은 상실을 겪고 있었다. 계획했던 진로를 포기해야 했고,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다. 우울했고 불안했다. 이 시기에 묵상한 죽음은 우울과 불안을 회피하는 방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이 시기에는 그것이 지혜처럼 느껴졌다.
세 번째는 26살 때다. 이때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 암이라는 질병은 나의 삶의 많은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죽음을 잊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인류의 보편적 운명이 다시금 고개를 내미는 시기였다. 다행히 지금은 항암 치료까지 마치시고 회사로 복귀하셨기에 우리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묵상한 죽음은 이별이었다. 처음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모든 관계와 단절된 채 혼자 떠나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죽음을 묵상했던 시기를 회상하다 보니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의 장례식에서 눈물 흘려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다. 나와 삶을 깊이 공유한 사람들은 많이 슬퍼하겠지만 누구는 오지도 않을 것이다. 오지 않을 사람들에 대해 섭섭해하던 중 죽음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삶을 묵상하게 되듯 나의 장례식에 올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면 내가 슬플까를 생각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이 생각났다. 지금 나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 지금은 멀어졌지만 그리운 사람들. 생각해보니 섭섭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여전히 내 곁엔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이 사람들이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실수가 잦고 후회가 많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름 잘 살았구나 안심이 되기도 한다.
30년 인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정의한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다. 사람들은 원하건 원치 않건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생기고, 이후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죽음이 오기 전까진 관계하는 삶은 지속된다. 그렇기에 인류의 보편적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관계하는 삶이다. 이는 우리가 운명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운명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