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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갯마을(1965)

-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의 작품 <베르세르크>는 중세 유렵풍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만화다. 흔히 명작으로 추앙받는 작품들이 그러하듯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퀄리티의 그림체로 종종 회자되곤 하지만, 심오하고 철학적인 내용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다. 주인공 가츠가 힘겨운 전투를 끝마치고 남긴 대사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는 거야”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인물의 심리와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삶과 전쟁을 동일시하는 진부한 메타포를 떠올려 본다면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이 메타포를 수용한다면 삶은 사는 것보다는 버티는 것이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가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인간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시시포스는 신을 기만한 죄로 깎아지른 산꼭대기에 거대한 바위를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정상에 놓인 바위는 곧 굴러 떨어진다. 시시포스는 항상 원점으로 돌아오는 노동을 영원히 끝내지 못한다.      



#영화 <갯마을(1965)>은 전쟁으로서의 삶 혹은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60년대 갯마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게 인생이란 아름답거나 달콤한 것과 거리가 멀다. 남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조각배 하나에 의지한 채 폭풍우 치는 바다로 나서야 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마음을 졸이며 가족을 돌본다. 남편 혹은 아들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그렇게 된 집안의 여성은 가장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들은 직접 물질에 나선다.



#주인공 ‘해순’은 과부다. 혼인한 지 한 달 남짓 된 날, 해순의 남편은 뱃일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 해순을 청상과부(靑孀寡婦)라 부른다. 해순의 앞엔 단순 과부보다 더 처량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해순은 시어머니를 돌봐야 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시동생이 죽은 남편 대신 뱃일을 나가지만 벌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순에게 더 이상 ‘내 여자가 물질하는 건 싫다’는 말을 건넬 남편은 없다. 해순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물질에 나선다.



#그런 해순이 ‘상수’에게 갖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남편의 친구 상수는 남편이 죽은 뒤 해순네 집안일을 가장 앞서 도운 고마운 사람이다. 하지만 상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태도를 바꾸고 해순에게 구애한다. 상수의 구애는 집요하고 지나치다. 2019년의 관점에서는 부적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구애는 해순의 마음을 흩뜨린다. 남편의 일 년 상도 치르지 않은 아내로서의 정조, 시어머니와의 관계, 마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해순은 고민한다. 상수가 남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당하지는 않을까.   


   

#해순은 결국 상수와 밀월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좁고 폐쇄적인 갯마을에서 영원한 비밀은 없다. 상수의 입방정으로 둘의 관계가 마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해순은 시동생의 도움으로 시어머니에게 재가를 허락 맡는다. 시어머니는 해순과 상수가 마을을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1960년대 한국은 이촌향도의 움직임이 꿈틀대던 때다. 둘은 자연스레 그 대열에 합류한다. 어촌을 떠나 채석장에 일자리를 얻은 상수는 뱃일과 채석장의 일을 비교하는 동료에게 말한다. “먹고살자면 뭔 일이든 못하겠소”



#해순과 상수는 갯마을 밖에서 자유로이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갯마을이라는 익숙한 삶의 터전에서 벗어난 둘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힘겹게 돌을 캐고 나무를 깎아도 둘의 생계는 나아지지 않는다. 삶 전체가 전쟁이라면, 갯마을 밖에서의 삶은 전장(戰場)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익숙한 전장을 버리고 새로운 전장으로 온 격이다. 바뀐 지형지물 속에서 낯선 무기를 들고 새로운 전투에 나서야 한다. 도망친 곳에서 낙원을 찾기 힘든 이유다.  



#해순은 상수가 있는 곳이라면 낙원이든 나락이든 상관없다고 다짐라지만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현실이 고될수록 해순은 바다가 그립다. 첩첩산중 속에서도 해순의 눈앞에는 바다가 일렁이고 귓가에 파도소리가 맴돈다. 바닷가의 청상과부의 삶이 이보다 더 나았을까. 그럼에도 해순은 익숙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해순이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한 상수는 해순에게 더욱 모질게 대한다. 의처증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고 해순의 행동을 의심한다. 상수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해순의 마음은 더욱 갯마을을 향한다.    


  

#결국 해순은 혼자 갯마을로 돌아온다. 떠나간 곳을 다시 돌아온 해순의 마음은 설렘과 불안이 교차한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남편이 죽자마자 다른 남자와 도망갔다가 염치없이 돌아온’ 자의 자격지심이다. 그런 해순의 귀환을 반기는 건 같은 처지의 과부들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무리이다. 과부들은 물질을 멈추고 해순을 마중한다. 물질할 때 사용하던 도구들을 껴안고 우는 해순에게 시어머니는 잘 왔다며 귀환을 반긴다. 그런 시어머니도 남편 없이 홀로 지낸 지 오래다.     



#1960년의 이촌향도는 농어촌의 빈자들을 도시의 빈민으로 만들었지만, 해순은 집으로 돌아왔다. 파편화된 도시의 빈민들의 삶은 빈자보다 처량하다. 해순의 전장은 다시 익숙한 바닷가다. 도망친 곳에서 낙원을 찾지 못한 사람 치고는 괜찮은 결말이다. 이곳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이야 말로 전쟁터에서 가장 좋은 무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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