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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미망인(1955)

-인간의 본성과 곳간

#한 학기가 끝날 때면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를 꼽아보곤 한다. 이번 학기는 ‘진화심리학’ 강의였다. (내가 수업을 들으며 이해한 바에 따르면) 진화심리학이란 대부분의 진화 과정을 수렵채집 상태에서 보낸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가며 형성된 인간의 심리기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최상의 목표는 단연 생존과 번식이다. 인류의 심리기제는 생존과 번식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진화심리학은 그러한 심리기제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초콜릿을 즐겨 먹는데, 진화심리학은 초콜릿을 즐기게 된 인간의 심리기제가 형성된 과정을 탐구한다.      



#우리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류 진화의 과정 속에서 초콜릿과 같은 음식에 들어있는  ‘당’이 생존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추운 계절에 우울해지거나 게을러지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식량 자원이 떨어지는 시기에 들떠서 활발해지면 체력도 떨어질 게 아닌가. 체력이 떨어질 때 생존 확률도 하락한다. 이처럼 탐구의 끝은 대체로 ‘생존’인데, 생존의 이유는 ‘번식’이다. 우리의 조상들에게 생존하고 번식해서 후손을 남기는 것은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말씀이 ‘본능에 따라 살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우리가 ‘이야기’를 즐기는 이유도 ‘생존과 번식’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행위는 ‘주변 정보 전달의 수단’ 혹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같은 전래동화는 ‘지역정보 전달의 수단’의 예다. 호랑이나 늑대 등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를 전달해서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게 목표다. 한편,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픽션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사고 실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갈등과 갈등의 해소의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의 과정을 간접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장 드라마에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막장’에 대한 정의는 제각각이겠지만, 일반적으로 막장으로 평가받는 이야기는 뻔한 전개와 자극적인 소재로 가치 폄하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는 불륜. 섹스, 폭력 등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소재의 집합이기도 하다. 진화적 관점에서 인간은 이런 이야기에 끌리기 마련이다. 막장 이야기가 텔레비전 드라마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추앙받는 작품들도 다르지 않다. 다음은 퀴즈! 다음이 의미하는 작품은?


   Q. 의사의 아내가 교구 목사와 간통하여 사생아를 임신했다.

   Q. 십 대 소년소녀들이 동반 자살했다. 가족들은 피의 복수극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Q. 오래 다락에 갇혀 있던 여자가 집에 불을 지르고 다락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Q. 전직 교사의 매춘 행위가 들통이 난 후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Q. 가난한 휴학생이 전당포업자와 그 동생을 도끼로 살해했음을 자백했다.     



#예컨대 진화적 관점에서 명작이란 소재의 막장 여부에 있지 않은 것이다. 막장인 소재가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사고 실험’인 이야기의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내의 유혹’과 ‘오만과 편견’을 가르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영화는 남편 친구와의 내연관계, 맞바람, 혼인빙자 등 막장 요소로 가득하다. 막장의 정도는 ‘아내의 유혹’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오만과 편견’에 더 근접해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신’이다. 전국 각지의 미망인이 급증하던 시기였을 테니 영화는 꽤나 일반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망인(未亡人)이란 단어는 21세기와 20세기의 온도차를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21세기 한국에서 미망인은 금기어다. 성차별적 단어의 대표라는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반면 20세기엔 남편을 잃은 여성을 일컫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 여성 신이의 삶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이가 미망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당시 사회상에 비춰본다면 타락의 과정과 겹치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영화는 1950년 대 미망인을 위한 ‘생존 가이드’다. 신이가 타락하는 과정은 생존과 번식의 확률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신이가 학비를 달라며 우는 딸 ‘주’를 타이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이는 우는 아이를 달래 학교에 보내며 눈물을 흘린다. 1950년대의 젊은 미망인 신이에게 제시된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옆집 여자처럼 젊음과 미모를 활용하거나 혹은 구걸하거나. 신이에게 전자의 선택은 치욕이다. 대신 남편의 친구를 찾아가 돈을 구걸한다. 그 과정에서 신이는 그의 아내에게 내연녀라는 오해를 산다.    


 

#그런 신이 앞에 젊은 청년 ‘택’이 등장한다. 바람둥이 한량인 택은 신이에겐 자신의 생육과 번성을 실현시킬 인물이다. 택을 만나고 신이는 더욱 빠르게 타락한다. 앞서 거부했던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가 하면, 택이 불편해하자 자신의 딸 주마저 다른 집으로 보낸다. 반인륜적이라고 비난받을 행동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어쩌면 가장 영리한 선택일 수 있다. 신이는 주의 존재와 자신의 생존, 훗날 낳을 자식의 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의 중요도 등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려했을 테고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진화심리학 교수님은 수업 중 “‘집단학살’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읽고 쓰기’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인간 본성의 비정함을 지적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 앞에 선과 악이란 없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이 본성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번창했지만 그건 배부르고 등 따시게 된 후의 이야기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진리인 것이다. 박남옥 감독이 묘사한 1950년대 미망인의 처지란 그런 것이다. 곳간이 텅텅 빈 상태. 그녀의 행동에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없으랴.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유실돼 볼 수 없다. 신이가 칼을 들고 자신을 배신한 택이를 찾아간다는 풍문만 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다. 신이의 생육과 번성에 방해되는 행동처럼 보이는 탓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폭력도 인간의 본성인 것을. 수렵채집 사회에 특화된 인간의 심리기제는 종종 현대 사회와 삑사리를 낸다. 우리의 심리기제가 적응할 틈도 없이 사회가 너무 급변한 탓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게으름은 에너지 보존에 도움이 됐지만 현대 사회에선 도태의 원인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고 보니 <미망인(1955)>은 반면교사까지 제시한 참 훌륭한 ‘생존 가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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