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벙어리 삼룡(1964)

-노예의 덕목과 삶의 관성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다. 개인적으로는 선언적이고 통념을 부수는 그의 글에 감탄한 적이 많았다. 흥미가 생겨 글의 출처를 찾아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골머리를 앓곤 했는데, 그의 사유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였다. 그의 선언들은 내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으나 선언이 나오게 된 경위와 그 이후의 벌어진 일들은 허영을 채우기 위한 노력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책장에 놓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꽂힌 책갈피가 수년째 10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는 이유이다.     



#니체의 많은 어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노예의 덕목’에 대한 규정이다. 니체는 근면, 성실, 순종 등의 가치를 노예가 갖춰야 할 덕으로 일컬었다. 니체의 어록을 접할 당시 난 의무경찰 신분으로 군 복무 중이었고 우연히 신문 칼럼을 통해 니체를 접했다. 니체가 이런 말과 글을 남긴 이면에는 복잡한 철학적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가 내게 바라는 것도 저것들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노예의 덕목을 갖출수록 난 군생활에 능숙해졌다.      



#<벙어리 삼룡(1964)>의 주인공 삼룡은 니체가 일컬은 노예의 덕목을 체화한 인물이다. 삼룡은 ‘벙어리’라서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 돈 많은 생원 댁에서 머슴 생활을 시작한다. 머슴은 한국적 정서가 가미돼 푸근함이 느껴지는 단어다. 니체에 따르면 삼룡의 본질은 노예다. 근면하게 일하고 매사에 성실하며 주인에게 순종적이다. 숙식 제공과 주인 어르신의 약간의 친절함에 대한 대가로 삼룡은 집안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한다. 당시 일반적인 노예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룡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 수십 년을 그렇게 보낸다.      


#그런 삼룡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주인집 삼대독자 광식이다. 다 큰 성인이 시도 때도 없이 삼룡을 괴롭힌다. 광식이가 어릴 때부터 계속돼온 유서 깊은 괴롭힘이다. 극 중 광식은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성품이 좋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요즘 말로 하면 인권 감수성이 바닥이고, 거칠게 말하자면 개망나니다. 삼대독자로 오냐오냐 자라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전국의 삼대독자들이 서운해할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남아선호 사상’을 폐해를 집약한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광식은 삼룡에게는 절대복종의 대상이다. 친절한 주인 어르신은 이런저런 일처리를 하느라 집에서 마주치기 쉽지 않다. 반면 광식은 오직 놀고먹는다. 온 동네가 광식이 세상이다. 활개 치며 다니다 할 일이 떨어지면 삼룡을 괴롭힌다. 삼룡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위해 헌신해왔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다. 삼룡은 언제나 광식의 장난감이고 샌드백이다. 종종 주인 어르신이 괴롭힘 받는 삼룡을 구해주지만, 버릇없는 자식을 이해하라는 말뿐이다.      



#삼룡이도 본인도 광식이가 주인 어르신께 혼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삼룡은 주인 어르신이 광식의 지나친 행동에 분개할 때면, 손짓 발짓 써가며 더 이상 광식을 나무라지 말기를 애원한다. 그것이 노예로서 길들여졌기 때문인지 광식의 보복이 두려워서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삼룡은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 운명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럴 운명이었다. 한 여인이 삼룡의 운명을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여인은 주인 어르신이 광식이의 혼인 상대로 데려온 여인 순덕이다. 삼룡은 순덕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순덕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지켜주는 것뿐이다.      



#광식의 망나니짓은 혼인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동네 유부녀와 불륜 행각을 벌이고 가정폭력을 일삼는다. 동네 사람들은 광식의 혼인을 두고 순덕의 신세를 불쌍히 여긴다. 인물도 성품도 집안도 빼놓을 게 없기 때문이다. 광식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아내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순덕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것을 약점 삼아 공격한다. 가부장제와 남아선호 사상을 휘두른 광식의 앞에 장애물이란 없다. 광식이 매일 같이 폭언과 폭행을 자행한 덕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어지자, 비난의 화살은 광식의 처에게 향한다. “여자 잘못 들이면 집 망한다더니…”     



#주인 앞에 언제나 순종적이던 삼룡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순덕이 광식을 위해 매번 고생하는 삼룡에게 주머니를 선물한 것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광식의 추궁이 순덕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지자 삼룡은 노예의 덕목을 망각한다. 니체는 노예의 덕목과 함께 ‘주인의 덕목’도 함께 제시한 바 있다. 주체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태도다. 삼룡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줄 알았던 주인의 덕목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삼룡은 태어나 처음으로 주인에게 반기를 든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벙어리’ 삼룡의 의견을 ‘경청’할 사람은 없다. 노예의 덕목을 망각한 노예를 기다리는 건 가혹한 처벌이다.      



#삼룡은 결국 노예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맨 순덕을 구하는 삼룡의 행동을 보고 광식의 오해는 더욱 가중된다. 결국 삼룡은 광식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피 흘리며 쫓겨난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화마에 휩싸인 광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선인의 ‘자기희생’으로 봐야 할까. 아니다. 노예의 덕목에 충실한 결과다. 삼룡은 자신을 평생 괴롭힌 사내를 복수할 기회를 놓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으며,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됐다.      



#노예의 덕목을 버리지 못한 자의 비극이다. 삼룡은 세월의 관성을 이기지 못했다. 노예의 삶에 익숙한 삼룡에게 노예가 아닌 자신은 없는 존재다. 순덕의 등장은 삼룡이 주인의 덕목을 실현한 계기를 마련해주었지만, 삼룡은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근면하고 성실하고 순종하는 태도는 삼룡에게 주체적 삶을 앗아갔다. 시키는 것에 익숙한 삼룡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모른다.     



#삼룡의 비극을 마주하며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 선택의 주체에 따라 우리는 삶의 노예도 주인도 될 수 있다. 때로는 삶의 노예가 되는 선택을 알고도 거부하지 못할 때가 있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 기억하면 삼룡과 같은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관성에 젖어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기.

작가의 이전글 [한국영화] 미망인(195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