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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청춘쌍곡선(1956)

-밥벌이의 지겨움과 숭고함

#몇 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재가 된 사건이 있었다. 한 인터넷 방송 BJ가 출근하는 시민을 모욕한 일이다. 당시 방송된 영상에 따르면 해당 BJ는 출근길 시민에게 ‘백수’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부럽다’ ‘좋은 하루 보내라’ 등의 덕담을 건넨다. 그러나 시민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곧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xx이까라’ ‘개xxx’ 등의 막말을 하며 고맙다고 인사한 시민의 태도를 비웃는다. BJ는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서 놀고먹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우월감을 내비친다.(https://news.joins.com/article/23501494)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수업이 생각났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 강의였다. 교수님은 원주민 문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중남미 원주민들이 보존해온 공동체 문화를 중요시하셨다. 서구 자본의 침탈이 극심한 와중에 가난하지만 순수하며 부지런히 노동하고 협력하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맑시즘의 냄새를 풍기는 언행과 툭툭 튀어나오는 반미 기질은 강의의 형식과 내용을 합치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교수님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말씀하셨다. “근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살까?” ‘뭐야, 소중한 가치라며!?’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가난하지 않아도 순수할 수 있고 부지런히 노동하는 것보다 놀고 싶은 게 당연하다. 뒤이어 교수님은 원주민들의 삶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설명하셨다.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수년이 지나 김훈 작가의 에세이집 <밥벌이의 지겨움(2003)>을 본 후에야 우리의 삶과 지구 반대편 그들의 삶이 겹쳐졌다. 매일 아침 고된 몸을 끌고 출근하는 부모님과 등굣길에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래,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밥벌이의 ‘숭고함’은 그래서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누가 창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멈출 수 없는 노동의 고단함을 위안할 무언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영화 <청춘쌍곡선(1956)>은 그러한 가난과 노동에 대한 찬가다.     



#주인공 명호와 부남은 같은 대학을 졸업한 친구다. 둘은 정반대의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다. 명호의 집은 삼시

세끼 보리죽도 먹기 힘들다. 그 때문에 선생님이라는 번듯한 직장에도 불구하고 영양부족에 시달리기 일쑤다. 반면 명호는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놀고먹을 수 있다. 과식으로 종종 병원 신세를 지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어느 날 둘은 병원에서 조우한다. 둘을 진찰한 의사는 말한다. 한쪽은 못 먹어서 아프고, 한쪽은 많이 먹어서 아프니 당분간 집을 바꿔서 생활하라!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투덜이 부남의 수난이 시작된다. 부촌에 자리한 집을 자가용을 타고 오가던 부남에게 달동네에 놓인 명호의 집은 멀기만 하다. 육수를 뽑아대며 등정한 곳에서 부남을 기다리는 건 쓰러져가는 하꼬방이다. 방도 변변치 않은 곳에서 부남은 명호의 여동생과 어머니와 살아야 한다. 밥이라고는 보리죽이 다인데, 담뱃값이면 살 고기도 못 먹는 집안 형편에 부남은 혀를 내두른다. 부남은 하루빨리 이 신세를 면하고 싶을 뿐이다.  



#부남을 교화시키는 건 명호의 동생과 어머니다. ‘하꼬방 신세’를 한탄하는 부남에게 명호의 동생은 말한다. “판잣집이면 판잣집이지 하꼬방이 뭐예욧!” 이들은 현실을 비관하는 법이 없다. 주어진 환경에서 순응하고 최대한 노력한다. 틈만 나면 물을 길어오고 장작을 팬다. 주말에는 종교 활동까지 한다. 이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부남에게 건강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르친다. 그 덕에 부남은 점차 노동의 가치를 깨우쳐간다. 그러자 건강도 회복한다.     



#한편 부남의 집에 도착한 명호가 제일 처음 하는 일은 철없는 부남의 여동생을 훈계하는 것이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그녀에게 일침을 가한다. 부남네 재력에 위축되기도 하지만 가난을 폄하하는 그녀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을 폄하하는 일은 근면성실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악의는 없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무지 탓이다. 부남이 명호의 집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면, 명호는 부남의 집에서 앎을 설파한다. 그 덕에 부남의 여동생 또한 부남처럼 무지를 깨닫고 지난날을 반성한다.      



#결과적으로 부남과 명호네는 겹사돈을 맺는다. 정신이 빈곤한 부남네와 물질이 부족한 명호네는 완벽한 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그깟 족보 좀 꼬이는 게 대수일까. 가난과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명호네는 그것을 해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구원받는 쪽은 부잣집 사돈을 얻은 명호네가 아니다. 근면과 성실의 가치를 깨우친 부남네다. 명호네가 그저 가난을 면하게 된 반면 부남네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행동을 그만두기 때문이다.      



#1950년의 관객들에게 <청춘쌍곡선>의 위안은 유효했을까. 알 수 없다. 적어도 2019년의 관객에게 밥벌이의 ‘숭고함’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기생충(2019)>에서 백수 아빠 기택이 한 ‘부자들이라 구김살이 없다’는 말은 그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앞서 소개한 인터넷 BJ의 사건도 그러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가난과 긍정적인 정신적 가치 사이의 연결고리가 깨진 사회다. 그렇다면 이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위안을 얻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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