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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삼포 가는 길(1975)

-이별의 여운

#'카톡 할게'는 이제 인사말이 됐다. 헤어질 때 하는 작별인사다. ‘밥 한 끼 하자’처럼 지켜질지 알 수 없는 으레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헤어질 때 하기에 이보다 더 이상 적절한 말은 찾기 힘들다. 지긋지긋한 연인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때를 제외하고 헤어짐에 기약이 있든 없든 쓰일 수 있다. 이 말의 속뜻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緣)을 이어나가자.’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는 초연결사회를 대표하는 기술이다. 일면 간단해 보이는 이 기술은 이용자를 1년 12달 365일 24시간 온라인 상태로 만들었다. 그 덕에 우리는 손가락질 몇 번만에 그리운 사람의 근황을 묻고 안부를 챙길 수 있다. 상대가 나와 다른 시간대와 기후대에 살더라도 상관없다. 기술은 탄생했고 이제 연락은 의지의 문제가 됐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카톡 감옥’이라는 신종 괴롭힘과 퇴근 후 ‘업무 카톡’이라는 스트레스다. 이것만은 의지의 문제라고 할 수 없겠다.      



#이같은 초연결사회에서 모두가 언제나 온라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헤어짐의 아쉬움을 경감시킨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는 환경에서 헤어짐의 무게는 사회가 초연결되기 전과 다를 것은 자명하다.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시대에 이별의 농도는 더욱 진할 수밖에 없다. 황석영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1975)>은 초연결사회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그 당시의 진하디 진한 이별의 여운을 짐작하게 한다.      



#주인공 ‘노영달’은 한량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자발적 한량은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자 하지만 그날그날 벌어서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런 영달에게 눈보라 치는 겨울은 동면이 필요한 계절이다. 영달에게 동면이란 이 집 저 집 신세 지며 불륜 상대가 되어주는 일이다. 여자 꾀는 능력이 있는 영달은 일시적 한량이 되길 택했다. 배부르고 등도 따시니 한겨울 추위에 갈 곳 없는 영달에게 이만한 일도 없다. 고향을 떠나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자부심을 밑천으로 일시적 한량 신분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한다. 눈보라 속에서 ‘정 씨’를 만난 것도 불륜이 발각돼 도주하던 때였다.      



#정 씨는 수수께끼 속 인물이다. 낡고 해진 옷차림 속에 비치는 거친 얼굴과 주름은 그의 연륜을 짐작하게 만든다. 10년간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는 정 씨는 종종 영달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신세로 만든다. 타향 생활에 지친 그는 이제 고향 삼포로 향하는 길이다.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며 고향을 떠나 먹고살기 위한 수많은 기술을 익혔지만, 고향을 떠나 10년을 헤맨 정 씨가 바라는 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정 씨는 사람 적고 땅 비옥한 고향 삼포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행선지가 정해진 정 씨와 떠돌이 영달은 임시 동행자가 되기로 한다.      



#둘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른 국밥집에서 여인 ‘백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주인은 가게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백화가 약속을 어기고 돈 훔쳐 야반도주했다며 검은 머리 짐승을 들인 것을 후회한다. 이어 영달과 정 씨에게 백화를 잡아오면 ‘1만 원’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고향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정 씨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 1원이 급한 영달은 제안을 수락하고 정 씨를 설득한다. 그 결과 정 씨의 행선지는 잠정 수정된다. 둘은 이제 눈보라 속에서 ‘백화’를 찾아 나선다.      



#영달의 예상대로 백화는 눈보라 치는 날씨에 먼길을 가지 못하고 발각된다. 백화는 자신을 가게로 데려가려는 영달에게 강하게 맞선다. 겉보기와 달리 드센 백화의 태도에 영달은 코웃음을 치지만 완력을 사용해 끌고 갈 만큼 영달의 심성은 차갑지 않았다. 정 씨와 영달은 결국 만원을 포기하고 가던 길을 간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산속에서도 빨간 반코트에 구두를 신고 있는 백화는 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다. 그 자존감은 자신의 몸값을 포기하고 제갈길을 재촉하는 영달을 도발해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다. 백화는 가게 주인의 말이 거짓이라며 떠나는 이들에게 소리치며 결백을 주장한다.      



#이른 나이부터 술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백화는 부모도 고향도 모른 채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왔다. 내세울 것 없는 출신 배경과 사회적으로 질타받기 쉬운 현재 처지에서 백화는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1970년대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백화는 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과장하고 자랑한다. 영일이 여자 경험을 허풍 떨 듯 자신이라고 그러면 안되냐는 식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사람 보는 눈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백화에게 영일과 정 씨는 ‘괜찮은’ 부류의 남자들이다. 백화는 이들과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이제 영화는 로드무비의 전형을 따른다.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동상이몽이다.     



#초연결된 현대 사회와 달리 1970년대 한국은 교통 인프라는 턱없이 열악했다. 그 덕에 이 이질적인 셋을 한데 묶인 것이다. 번번이 놓치고 마는 버스는 빈털터리 세 사람이 걷고 또 걷게 만든다. 한겨울 눈보라를 헤쳐 산을 넘으며 생긴 갈등은 때로는 깊어지고 때로는 해소되며 세 사람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만든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영달과 백화는 이제 서로의 ‘츤데레’를 전담한다. 정 씨는 그 둘이 방황을 마치고 함께 정착하길 바란다. 영달과 백화가 지나는 삶의 방황기를 이미 지나온 정 씨에게 둘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정 씨의 노력으로 영일과 백향의 감정은 사랑으로 진화한다.      



#세 사람이 흩어져야 할 갈림길에 다다르자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백화는 영일과 함께 하길 희망하지만 영일을 망설인다. 밑천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가족을 꾸리는 건 사치기 때문이다. 둘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요즘 같은 때면 카톡을 하든 문자를 하든 서로 계속 연락을 하며 자리를 잡은 후 재회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꿈같은 이야기다. 한 번의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 세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기에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셋은 결국 뿔뿔이 흩어진다. 정 씨는 고향 삼포, 영일은 일자리가 있는 곳, 백화는 목포에 도착한다. 애당초 각자의 행선지에 도착한 셈이다. 셋은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듯 헤어지나 모두가 알고 있다.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거란 사실을. 이별의 정류장에서 영일과 백화 흘리는 눈물과 그들을 바라보는 정 씨의 시선은 진한 이별의 여운을 내뿜는다. '카톡 할게'가 인사말이 될 수 없는 시대의 이별이다. 그 이별을 지금의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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