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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서울의 휴일(1956)

- 삶의 불확실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한때 삶의 불확실성이란 주제에 천착한 적이 있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2017)>를 본 직후였다. 영화는 촉망받는 의사 부부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유하고 이상적인 이 가정에서의 일상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집도의의 손짓을 닮았다. 그런데 이 가정에 균열이 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후 설명도 불가한 사건이다. 첨단의 기술을 직업적 도구로 삼고 냉철한 이성을 삶의 태도로 견지해온 의사 부부도 이러한 삶의 불확실성 앞에 무력해진다. 이 순간 넘치는 돈도 명예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진부함을 설파한 한나 아렌트는 모든 인간에게는 두 개의 국적이 있다고 말한다. 건강한 나라의 국적과 병든 나라의 국적이다. 병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갑작스러운 사고까지 고려하면 병은 삶의 예측불가능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내게 한나 아렌트의 말은 <킬링 디어>의 감상과 겹쳐 삶의 불확실성은 모든 인간 군상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말로 이해됐다. 빈자와 부자의 격차가 점점 넓어지는 때에 나 홀로 뿌듯한 발견이었다. “빈자와 부자간 공감의 영역이 여전히 남아있다니!”    


           

#빈부의 차이가 확대될수록 빈자와 부자가 상호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줄기 마련이다. 소득이 벌어지면 공간이 분리되고 삶의 경험이 달라진다. 혹자는 그럼에도 시간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이처럼 공허한 말도 없다. 시간이야말로 있는 사람에게나 효율적인 자원이다. 누군가가 전용기사가 운전하는 아늑한 차 안에서 잔업을 보며 출퇴근을 할 때 누군가는 두세 번의 환승을 거쳐 일터와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빈자와 부자가 공유할만한 삶의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말마따나 <킬링 디어>의 가정은 한순간 병든 국가의 시민이 된다. 돈과 명예로 쌓아왔던 공고한 요새에 균열이 생기자 삶의 불확실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상류층의 삶이 대책 없이 무너진다. 우여곡절 끝에 건강한 국가의 시민 지위를 회복하지만 이 가정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또 다른 불확실성을 걱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빈자와 부자의 삶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어쩌면 삶의 불확실성은 좁혀지지 않는 소득의 격차처럼 벌어진 빈자와 부자간의 삶에 남은 유일한 교집합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휴일(1956)>은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조명한다. <킬링 디어>가 모든 인간 유형의 삶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대해 말한다면 195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정도의 차이’에 주목하게 한다. 빈자든 부자든 삶의 불확실성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 또한 선명하다는 것이다. 빈자의 삶에 나타난 불확실성은 빈자의 삶을 재기 불능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반면 부자가 마주한 불확실성은 삶의 이벤트 정도로 치환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추억으로 곱씹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는 네 종류의 가정이 등장한다. 이 가정들은 청년세대와 장년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각 세대의 가정은 부유한 가정과 빈곤한 가정으로 다시 구분된다(부유한 젊은 가정-빈곤한 젊은 가정/부유한 장년 가정-빈곤한 장년 가정). 이 가정들은 1950년대 서울에 거주하던 각 계층을 대표한다. 각각의 대표들은 삶의 불확실성이란 필연과 직면한다. 하지만 불확실성의 정도와 양상은 각기 다르다.               



#부유한 젊은 가정이 겪는 삶의 불확실성은 휴일 계획이 틀어지는 정도다. 신문기자 남편과 산부인과 의사 아내는 오랜만에 맞는 휴일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빼곡하게 적어둔 둘의 계획은 이행도 전에 짓궂은 친구들의 장난으로 틀어진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외 오케스트라를 볼 수 없게 됐다. 아내는 갑작스레 사라진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기에 이르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모든 오해가 해소된다. 이들은 삶의 관성을 곧 회복하고 상류층 가정의 모습으로 복귀한다.            


   

#반면 빈곤한 젊은 가정의 삶이 마주하는 불확실성은 더욱 극적이다. 공간의 차이부터 명확하다. 부유한 젊은 가정의 하루가 다층 양옥집에서 펼쳐지는 동안 이들의 삶은 달동네에 위치한 허름한 단칸방에서 소비된다. 배곯는 어린 딸,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 범죄 용의자로 체포된 남편까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의 연속이다. 이들에게 삶의 관성을 회복할 기회는 없다. 삶의 불확실성이 내일을 더 빈곤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년 가정의 양상도 다르지 않다. 부유한 장년 가정에게 삶의 불확실성이란 단조로운 삶의 경종을 울리는 정도로 작용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하루를 보내며 ‘인생은 육십부터’를 되뇌는 이들의 모습은 은퇴 후 취미 생활을 즐기는 고상한 삶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빈곤한 장년 가정에게 이러한 까르페 디엠식 삶의 양식은 먼 나라 이야기이다. 괜찮은 놈 잡아서 시집을 보내려던 딸마저 돼먹지 못한 놈에게 꾀여 혼전임신에 이른다.  


             

#주목할 점은 빈곤한 가정의 불확실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빈곤한 가정의 여성들이 홀로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동안 부유한 가정의 여성들은 남편의 품에서 빈자의 집을 배경으로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저 그런 단조로운 삶을 한탄한다. 가난한 가정에서 삶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대물림되는 동안 부유한 가정에서 출산과 육아는 걱정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휴일 동안 부유한 가정과 빈곤한 가정의 하루를 스쳐간 삶의 불확실성이 갖는 격차란 그런 것이다.            


   

#극 중 빈곤한 가정이 직면한 삶의 불확실성을 잠시나마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부유한 가정의 시혜적 태도다. 그들의 선행 덕에 빈곤한 가정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리고 부유한 가정의 휴일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수놓은 듯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며 끝이 난다. 어찌 됐든 두 가정 모두에게 이익이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고 넘어가면 될까. 혹은 <킬링 디어>에서 보이듯 이제 삶의 불확실성은 더 이상 빈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의 휴일>이 만들어진 지 60년이 넘게 흘렀다. 우리의 모습은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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