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다
#베트남의 전쟁 영웅 보 응우옌 잡은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으며, 적이 예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내용의 3불전략을 강조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전략으로 보 응우옌 잡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축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베트남을 재식민지화 하고자 했던 프랑스 군과 자유세계 수호라는 거창한 구호를 든 미군은 베트남군에 비해 분명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 응우옌 잡은 이 비대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든 이들이 싸움의 전략을 짤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나, 망각하기 쉬운 싸움의 법칙을 보 응우옌 잡은 3불전략이라는 명확한 언어로 정립한 것이다.
#없는 이들에게는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가난할수록 더 똑똑해야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이 진리는 격투기에 비유할 때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체급 차이가 지나치게 큰 두 사람의 격투를 가정해보자. 이때 체격이 큰 사람은 특별히 싸움의 법칙을 강구할 필요가 없다. 큰 체격은 큰 부피와 무게를 의미하고, 이때 이 사람은 존재 자체가 전략이 된다. 반면 체격이 작은 사람은 특별한 전략을 찾아야 한다. 부딪히기에 앞서 멀찍이 떨어져 상대의 약점을 탐구하거나 상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등 앞도적인 체격을 가지고 있다면 들이지 않았을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같은 진리가 빈부의 차이를 통해 드러난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될 노력을 해야 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는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런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는 '신자유주의'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붙어있다. 이같은 사회에서는 법과 제도마저 자본을 향해 기울어진다. 그 결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메이저리그 프로팀과 그들의 홈구장에서 경쟁하는 사회인 야구단, 아니 초등학생 야구부 신세가 된다. 프로팀을 향한 수만 팬들의 응원과 초등학생 야구부를 향한 조롱 섞인 비웃음은 덤이다. 베넷 밀러 감독, 브레트 피트 주연의 영화 <머니볼(2011)>은 메이저리그 팀과 사회인 초등학생 야구부의 격차까지는 아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필승법을 강구해야만 하는 약자에 관한 이야기다.
#메이저리그 최약체로 평가받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은 팀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분투한다. 단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팀에 도움이 될만한 선수를 영입하고 그렇지 못한 선수를 내보내는 것이다. 그는 좋은 안목과 넘치는 열정을 가졌지만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그의 발목을 잡는 건 팀의 열악한 재정과 탁상공론이다. 구단의 가난 탓에 실력 좋은 선수는 값이 비싸 영입이 힘들뿐더러 팀 내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는 선수는 돈 많은 구단에게 뺴앗기기 일수다. 선수 대기실 음료도 선수들이 직접 돈을 내고 뽑아먹는 팀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한편 구단의 직원들은 탁상공론만 일삼는다. 빌리 빈의 추진력을 뒷받침하기에는 지나치게 관료적이다. 전통과 관습에 따라야 한다며 수차례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방식을 고집한다. 선수 영입 회의에선 후보 선수에 대한 얕은 인상비평이 전부다. 그러나 계속된 실패의 원인이 인상비평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리그에서 선수를 영입하는 주류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안목은 거기서 거기다. 가난한 팀에 좋은 선수는 넉넉한 팀에게도 좋은 선수다. 그에 따라 인상비평의 결과도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좋은’ 선수는 돈 많은 팀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오클랜드’의 문제는 바로 여기다. 다른 팀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들과 같은 방법을 고집했다는 것.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승리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패자를 위로하기 위한 연민의 언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법칙이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이 바로 프로스포츠의 세계다. 이 혹독한 세계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빌리 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승리다. 그래서 과정만 있고 결과는 시원찮은 직원들의 관료주의가 못마땅한 것이다. 그런 빌리 빈의 시야에 '피터 브랜드'가 들어온다. 피터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데이터 분석가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오클랜드의 직원들의 인상비평과 다른 방법으로 선수들의 전력을 평가한다. 피터의 판단 근거는 데이터다. 피터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선수의 사생활과 외모를 평가하기보단 홀로 컴퓨터 앞에서 선수들의 경기 데이터를 분석한다.
#오늘날 데이터는 아주 흔한 말이 됐다. 어딜 가도 데이터(란 단어가 넘쳐난)다. 잠들기 전 내가 별생각 없이 틀었던 노래나 영상도 데이터가 된다. 그런 데이터가 모여 세상을 바꾸고 있다. 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의 문턱까지 온 작금의 문명에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됐다. 스포츠도 데이터와 함께 변하고 있다. 데이터는 이제 선수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잣대 중 하나다. 그러나 <머니볼>이 탄생한 2002년엔 선수 영입과 데이터를 연결 짓는 일은 드물었다. 빌리 빈은 데이터를 활용한 접근법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이어 피터를 오클랜드 부단장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둘은 이제 인상비평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인재 영입에 차용한다.
#그러나 변화에는 언제나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둘은 기존 직원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숫자'를 활용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이 자신들의 인상비평보다 나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방식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배수의 진을 친 빌리 빈에게 좌고우면 할 여유는 없다. 기존 방식을 고수해도 망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도 망한다면 뭐든 해보고 망하는 게 후회 없는 길임은 자명하다. 빌리는 모두의 반대와 조롱을 견디며 피터의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창조한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다'는 경구를 남겼다. 누군가 넘어지고 상처 받으며 지나간 흔적은 후에 여러 사람들이 걸어가며 길이 된다. 길은 희망의 메타포다. 사람들은 관습과 전통이라는 증명된 길을 두고 위험한 모험을 하는 이들을 조롱하곤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예를 만들지만 어리석은 자는 예에 얽매이며, 훌륭한 자는 법을 바꾸지만 모자란 자는 법에 붙들린다”는 전국시대 공손앙의 말마따나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이 어리석은 빌리 빈은 확신과 추진력으로 새로운 길을 만든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과 피터가 창조한 길은 누구나 이용하는 길이 됐다. 이제 그 길을 이용하지 않고 최고가 되긴 힘들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관습과 전통도 마찬가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빌리 빈의 길도 언젠간 낡은 길이 되어 새로운 길의 탄생을 방해할지 모른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도 누군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