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영화] 서버비콘(2018)

-구부러진 막대기 펴기

by leesy

#구부러진 막대가 있다. 막대를 바로 펴기 위해서는 구부러진 방향의 반대쪽으로 막대를 꺾어야 한다. 때로는 막대가 부러지거나 끊어질 수도 있다. 막대가 꺾인 정도에 따라 힘의 크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라 막대에 손상이 갈 위험도 커진다. 그럼에도 막대는 바로 펴져야 한다. 흔히 차별받는 소수자의 처지는 이같은 구부러진 막대에 비유되곤 한다. 차별을 시정하는 과정이 기득권의 반발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구부러진 막대기 비유는 그럴듯해 보인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한 자유관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집단에서 떨어진 ‘개인’이라는 개념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밀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말은 매우 당연하게 들린다. 그러나 당시는 종교, 전통, 관습 등의 이유로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했다. 밀은 개인의 이같은 태도가 사회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의 연장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가할 위험이 현저하지 않다면 어떤 사상과 생각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생각도 진리를 일부분 담고 있으며, 일말의 진리도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다른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해 준다는 이유였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에 이만큼 좋은 논리가 있을까. 밀의 사상은 집단의 획일성에서 벗어나 개인들이 각자의 삶을 개척하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무기가 됐다. 최근 난무하는 혐오의 언어를 직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곳곳에서 삶이 팍팍해진 틈을 비집고 참주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들의 걱정과 근심을 집단화된 분노로 주조한다. 왜곡된 분노의 화살은 표현의 자유라는 궁을 타고 사회의 소수자를 겨냥한다. 누구도 이들이 내뱉는 혐오의 언어에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밀의 말처럼 다른 진리를 빛나게 하는 반사효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1940년에 개봉한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최근 한 스트리밍 서비스에 게재되며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영화가 흑인에 대한 차별과 고정관념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영화 게재를 중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으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거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영화를 계속해서 게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고전을 오늘의 시선으로 단죄하면 남아날 작품이 있겠느냐는 탄식도 그들의 말이다. … 예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이고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존엄이라고 상상해 보는 순간 누구든 예술 애호가이기를 멈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밀이 말한 자유의 속성은 기득권에게만 유효한 듯 보인다. 진리를 품지 못한 주장이 기득권의 입에서 나왔을 때와 소수자의 입에서 나왔을 때의 차이는 명약관화하다. 전자의 것은 개구리를 향해 장난으로 던진 돌과 같다. 그러나 후자의 것은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이며, 오히려 소수자의 부도덕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밀의 자유관이 진리를 빛나게 해 주기보다 왜곡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조지 클루니 감독의 <서버비콘(2018)>은 이처럼 구부러진 막대기를 바로 펴기 위해 막대기가 부러질 각오로 힘을 가하는 영화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을 위해 조성된 교외의 주택단지 서버비콘. ‘미국의 중산층’하면 떠오르는 풍경 그 자체다. 줄지어 들어선 멀끔한 집들, 잘 다듬어진 잔디, 친절한 이웃 등 아메리칸드림의 상징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 가드너는 아내 로즈, 아들 니키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면 위의 모습에 불과하다. 영화는 두 개의 서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가드너 가족을 둘러싼 음모가 하나의 축이다. 완벽해 보이는 이 가정에는 잔혹한 음모가 도사리는데, 로즈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 가드너는 로즈를 죽이고 보험금을 수령하고자 한다.



#다른 축은 서버비콘으로 이사 온 다른 한 가족에서 뻗어간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사건이 흑과 백이라는 인종적 요소와 만나며 비극으로 비화한다. 서버비콘은 중산층을 위해 조성된 도시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중산층의 절대다수는 백인. 서버비콘의 새 이웃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조롱과 멸시의 시선을 감내한다.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커뮤니티는 흑인 가족을 쫓아내기 위해 온갖 논리를 동원한다. 흑인은 지능이 낮고 교육받지 않았으며 게으르기 때문에 백인 커뮤니티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커뮤니티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이 영화의 선과 악은 분명하다. 백인이 악이고 흑인이 선이다. 각종 콘텐츠의 서사가 점점 고차원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이처럼 선과 악이 단순하게 구분되는 영화는 드물다. 몰지각함, 폭력성, 권위적 태도, 물질만능주의 등의 부정적 가치들은 백인의 행동에서 파생되는 반면, 흑인들은 이러한 부조리를 인내하는 존재들이다. 영화 밖 세상에서 흑인과 백인의 속성이 이처럼 구분이 될 리 만무하다. 인종에 따른 속성이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백인들의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희화화하고 있다. 백인들의 백래쉬를 야기할 요소마저 도사린다. 그렇다면 <서버비콘>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구부러진 막대기를 펴보려는 노력에서 엿보인다. 때로 극단적인 상황 가정은 현실의 모순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서버비콘>은 현실 속 부조리함을 드러내기 위해 단순하되, 극단적인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차별받는 흑인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백인은 욕망만을 좇는 가해자로 만들었다. 영화 속 이분법적 구조는 재고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이러한 접근법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진단은 100% 적중한 것 같다.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2020년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인종갈등은 구부러진 막대기 같은 현실을 실감케 한다. 차별은 가하는 기득권들은 표현의 자유와 같은 인류의 보편가치로 무장한다. 표현의 자유는 나와 다른 사람의 존엄을 해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의 자유도 과연 옳은 것일까.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밀의 자유관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자유의 조건은 애써 외면한다. 난 역사의 수레바퀴가 더 나은 방향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속도는 기득권에 달려있다. 구부러진 막대기는 언젠가 바로 펴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막대기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각오다.

작가의 이전글[외국영화] 로마(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