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적으로 기만하기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백 년의 고독』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
“내가 늙었을 때 뱃사람이었는데 폭풍이 칠 때 물에 빠져 죽었어. 파도가 엄청났거든! 아주 어둡고.. 번개가 쳤어 난 수영을 못 했어.” (<로마(Roma)> 알폰소 쿠아론 )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영화에 적용하려는 시도다.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 년의 고독 고독(1967)』에서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의 전형을 제시한 이래로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전통이 됐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허무는 문학적 서술은, 객관적 언어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기구한 역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인식의 발로였다. 마르케스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통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1492년 이래로 축적된 갈등과 모순 속에서 전면적 진실을 추구한다.
# <로마>는 1960년대 말을 배경으로 촬영된 멕시코 태생 감독의 자전적 영화로 백인 중산층 가정과 원주민 출신 식모에 관한 이야기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이지만 둘 사이를 구분 짓는 근본적 요인은 백인-원주민으로 구분된 인종이다. 영화는 태생적으로 서로의 삶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여성의 삶이 겹쳐지는 과정을 아주 느리게 추적한다. 추적에 필요한 도구는 형식적 도구로서 ‘롱테이크’와 내용적 도구로서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자신의 장기인 롱테이크 신을 뽐낸다. 전작의 롱테이크 신에 담겼던 시각적 즐거움(<그래비티(2014)>)이나 서사의 박진감(<칠드런 오브 맨(2006)>) 대신 <로마>의 롱테이크는 최대한의 사실감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흑백 화면과 배제된 효과음은 그 현실성을 배가한다. 이 때문에 <로마>의 형식은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다. <로마>의 롱테이크가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카메라가 좌-우 방향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상-하로도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의 첫 장면-마지막 장면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영화는 화면 가득히 집 내부의 주차장 바닥을 보이며 시작한다. 그러나 식모 클레오가 청소를 위해 바닥에 물을 뿌리고, 뿌려진 물이 하늘을 비추기 전까지는 스크린에 보이는 것이 벽인지 바닥인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이처럼 바닥에서 시작한 카메라는 러닝타임 동안 좌-우, 상-하의 움직임을 반복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날아가는 비행기를 직접 보여주며 끝난다. 관객은 빨랫감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를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카메라가 하늘을 담아내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과정이 생략된 채 바닥에서 시작했던 첫 장면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장면 간 연결성을 강조하는 형식은 사회계층의 하층을 대표하는 식모 클레오와 상층을 대표하는 소피아의 삶이 중첩되는(혹은 연결되는) 과정과 조응한다. 영화는 멕시코 사회계층의 분화를 명확하게 드러내는데, 현대적인 도시에서 원주민은 하층 노동자로 존재하지만 흙먼지 날리는 미개발지역에 사는 백인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사한 장면이 한 번은 백인 삶의 양식으로, 또 한 번은 원주민 삶의 방식으로 대칭을 이루기도 한다. 예컨대 백인 꼬마가 널찍한 별장이 딸린 곳에 놀러 가 그럴듯한 우주인 변장을 하고 숲을 누빌 때, 원주민 꼬마는 흙먼지 날리는 빈민촌에서 종이봉투를 뒤집어쓰고 구정물 위를 뛰어 논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이 같은 대칭 구조의 반복은 산부인과에 갈 돈도 없는 클레오와 집사를 여럿 부리는 소피아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과정 속에서 ‘계층을 뛰어넘는 연대’라는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연결성 짙은 영화의 형식이 아래와 위, 하층과 상층의 삶의 교차성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구축한 형식과 주제의식의 조화는 천의무봉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이 <로마>의 미학적 성취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사회적 관점에서 일종의 기만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10% 남짓한 백인이 사회 상층부를 점유하는 멕시코 사회에서 ‘계층을 뛰어넘는’ 어떤 것도 낭만적인 수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이 대목에서 마르케스와 알폰소 쿠아론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상반된 지점에 위치한다.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총체 소설론’에 따르면 ‘심층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현실을 바라보는 감각적 층위에 더해 신화적·몽환적·형이상학적인 신비적 층위를 포괄하는 ‘총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백 년의 고독』은 그러한 시도의 하나였다. 마르케스의 시도가 라틴아메리카의 기구한 역사를 바르게 규명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그러나 ‘소설의 죽음’이 점쳐지던 당시 문학계에서 마르케스의 등장이 새로운, 혹은 신선한 성장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시각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라틴아메리카 내부의 신산함을 전달하고자 했다면, 알폰소 쿠아론의 그것은 사회 속 내제한 갈등 요소를 완화하는 데 복무한다. 즉 전자의 것이 불가해한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면, 후자의 것은 그 모순을 정당화한다.
#영상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현하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다. CG의 사용이 일상화된 영화 제작 환경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체성은 불명확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감독은 러닝타임 내내 구축해 온 형식적 사실주의 속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현함으로써 CG와 마술적 사실주의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구분 짓는다. 예컨대 산불을 끄느라 바쁜 사람들을 배경에 두고 가면을 벗고 노래를 부르는 이를 전경에 두거나, 전생을 기억하듯 얘기하는 어린 아들, 운동장에 모여 봉술을 훈련하는 수십 명의 남성들이 나오는 장면 속에서 나타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흔적은 형식의 사실주의가 구축한 세계 내에서 비현실적이기보다 초현실적으로 형상화된다. 그 결과 ‘계층을 뛰어넘는’ 어떤 것도 가능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짧게나마 <로마> 내의 젠더적 관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연대의 주체는 여성들이며 연대를 야기하는 주체는 남성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이 진부한 대립구조에 특수성을 부여한다. 초기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그 결과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의 혼혈아가 급증한다. 그것이 혼인에 의한 것인지 강간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 당시 유럽인들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 상기한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로마>의 이항대립적인 젠더적 관점은 라틴아메리카의 이 같은 역사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로마>의 형식적·내용적 요소의 조화가 사회적 기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영화의 본령이 ‘체험’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을 때, <로마>의 성취 또한 명확하다. 상호 간 삶이 겹칠 수 없는 시공간의 차이 두고 2019년을 사는 한국인에게 원주민 여성의 신산한 삶의 굴레를 간접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로마>의 존재 이유는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