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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ul 15. 2020

[한국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자유와 불안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 불안의 원인을 탐구했다. ‘실존이 존재에 앞선다’는 난해한 말을 남긴 사르트르는 불안의 원인을 ‘목적 없음’에서 찾았다. 망치나 연필과 같은 도구는 그 목적 혹은 쓰임이 명확하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존재하고 연필은 필기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런 도구들과 달리 인간은 이유도 사명도 없이 단지 세상에 던져졌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신과 같은 절대자에 의해 숙명을 띤 피조물 아니며 단지 태어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신의 말씀에 따라 살거나, 국가를 위해 일신을 바칠 이유도 없다. 이같은 주장의 연장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이제 내가 태어난 이유와 사명은 내가 찾아야 한다. 인간이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존재이며, 인생이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인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불안의 원인이다.      



#자유와 불안은 동전의 양면이다. 삶의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불안하다. 메뉴가 지나치게 많은 식당이나 오지선다 대신 주관식 문제를 찍어야 할 때를 생각하면 선택지와 불안의 상관관계는 좀 더 명확해진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선택한 자의 몫이다. 사르트르가 이같은 철학을 폈던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시점이었다. 전례없이 참혹했던 전쟁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소중히 여겨왔던 가치를 파괴하고 관습과 전통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종교가 가진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해서 사르트르의 주장은 거대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들은 신의 말씀을 지표로 삼아서 선하게 살아야 할 목적이 없다면 공동체는 파괴될 것이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안티 휴머니즘이다!”       



#당시 사람들의 반발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와 불안은 늘 함께 했다. 그 불안을 해소하는 오래된 방법 중 하나가 종교다. 세상은 변수로 가득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의 길목길목에 종교는 이정표를 세우고 지침을 내려준다. 불안에 직면할 때 각자가 믿는 절대자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폭거나 인간사(事)의 복잡함은 절대자가 인간의 믿음을 향해 내린 시험이며 해결책은 절대자에게 정성 들여 기도하고 그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인간의 불안은 절대자에서 시작해 절대자에 의해 해소되어 왔다.      



#근대 사회에서 불안을 해소하는 또 다른 방법은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다. 삶의 미로에서 헤맬 때 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 또한 불안을 잠재우는 유서 깊은 방식이다. 근대 역사를 비춰 볼 때 국가와 민족은 헌신하기 가장 적합한 공동체의 규모였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열광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내가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조롱하지만, ‘우리나라가 최고다’ 혹은 ‘우리 민족이 최고다’라는 말에는 열광한다. 양차 대전은 인간이 얼마나 이같은 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몰입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공동체가 정한 삶의 궤도와 규범에 순종하면 불안은 다소 누그러든다. 개인은 공동체를 위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이같은 것들을 모두 부정하며 인간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혹은 저주를 내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공동체 이데올로기도 옅어지는 때에 자유와 불안의 연결고리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점증하는 자유에 비례하는 불안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은 직면한 불안에 갈팡질팡하는 청춘들의 양상을 그린다.



#병태와 영철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다. 둘은 절친이지만 닮은 구석을 찾긴 힘들다. 병태는 가난하되 건강하고 영철은 부유하되 허약하다. 둘은 입영 신체검사에서도 각각 합격과 불합격 통지를 받는다. 성격도 딴판이다. 병태는 천진하고 다소 유쾌한 반면 영철은 조숙하되 염세적이다. 이런 상반된 둘이 공유하는 건 청년기의 불안이다. 삶이 불안하지 않은 시기가 어디있겠냐만은 청년기의 불안은 조금 특별하다. 부모님과 학교라는 울타리 밖을 막 벗어난 시기다. 울타리 안 삶은 답답하되 안전했다. 집 안과 밖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정한 규칙에 따라 지내면 됐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의 무게를 모르는 시기다. 병태와 영철은 이제 막 그 울타리 밖을 벗어났고, 둘의 처지가 어떻든 자유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울타리 밖에서 삶의 방향은 각자가 정해야 한다. 선택의 결과도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두 사람은 산재된 수많은 삶의 지표를 마주하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어지럼증을 느낀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그럴듯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교수님은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을, 부모님은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것을 충고한다. 이들은 분명 선택의 시행착오를 병태와 영철의 곱절은 겪었을 것이고, 실패와 성공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했을 터다. 그러나 병태와 영철은 삶의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그들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이미 어딘가 정박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충고는 둘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둘은 오직 자신들과 같이 불안에 허덕이는 청춘들 속에서 잠깐의 위안을 느낄 뿐이다.      



#일본의 작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불안에 대한 탁월한 묘사로 이름을 알린 만화다. 각자의 사정으로 빚더미에 나앉은 이들이 부자들의 오락거리로 전락한 상황을 풍자한다. 채무자들은 매 순간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남들과의 경쟁에 승리해야 한다. 얻은 상금은 빚을 갚는 데 쓰이는데, 이 과정에서 죽고 다치는 채무자들을 부자들은 웃고 떠들며 즐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과 절망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이때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통신(通信)’ 뿐이다.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통신이다. 서로 직접적으로 힘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은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적지 않은 위안을 느낄 수 있다. <바보들의 행진>의 병태와 영철도 서로 통신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것이 전부다.      



#불안의 완전한 해소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병태와 영철을 비롯한 우리는 그것을 꿈꾼다.  병태는 입대를 통해 불안의 고리를 잠시 끊어보고자 한다. 영철은 넘실대는 동해바다를 마주한 채 아찔한 절벽을 향해 돌진한다. 내 입장에서 불안을 마주하는 둘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확실한 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병태와 영철의 선택 어느  하나도 따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통신이다. 누군가는 통신이 대증요법에 그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은 해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통신은 최선의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지점은 오늘날의 통신이 개인의 불안을 자극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이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기 쉬워진 요즘 통신의 오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한 가지 선택지만 있는 듯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통신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통신을 통해 불안을 견딜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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