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면
윤여정에 이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꼽혔던 글렌 클로즈는 <힐빌리의 노래>에서 괄괄한 할머니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쇠락한 공업단지를 배경으로 엄마의 폭력과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허덕이던 소년 제이 디는 할머니의 헌신 덕에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성취에 도달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란 사실이 감동을 더하지만, 모든 실화가 영화 같을 순 없다. 제이 디의 성공 신화는 오직 제이 디에 한정될 뿐이란 사실은 엔딩 크레딧이 끝난 뒤 가슴 한편에 씁쓸함을 남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에서 어린이의 장래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휘청인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부모의 영향은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만병통치약 같던 노력도 가정환경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영어유치원을 다니며 자란 아이가 고액 과외를 받으며 장래를 준비할 때 어느 집의 아이는 맞벌이 부모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에 의지해 시간을 보낸다. 이런 아이들에게 노력을 말하는 건 방치와 다르지 않다.
하위 10%와 상위 10%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코로나19는 형편의 차이가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공립초등학교 일주일 평균 등교일 수는 1.9일인 반면, 사립초는 4.2일이었다. 원격 수업의 질도 현저하게 차이 난다는 불만 또한 쏟아졌다. 방역을 이유로 급식이 사라지자 끼니를 거르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연간 1000만 원이 넘는 사립초 학비를 감당할 부모가 있어야 한다.
한편 부모가 가난할수록 증가하는 아동학대 위험도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엄마의 학대와 방치 속에서 엇나가던 제이 디를 보듬어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현실의 할머니는 그럴 여력이 없다. 게다가 그런 할머니의 도움을 받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을 자제력과 지적 호기심 없다면, 제이디처럼 성공하기 힘들다. 타고나지 않는 한 불우한 가정에서 쉽게 생기지 않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공적지원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우한 환경과 부모의 부족한 역량으로 생긴 아이들 삶의 공백을 국가가 나서서 채워야 한다.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역할이다. 우리 사회는 양육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밀어둔 채 너무 긴 시간 방치해왔다. 환경은 중요하지 않으며, 성실히 노력하면 뭐든 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을 바로보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사람은 본인이다.
2차 대전의 영웅이자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어린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귀한 자원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귀한 자원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래를 위한 확실한 투자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기적으로 터지는 아동학대 사건과 점차 벌어지는 교육 격차 앞에선 누구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