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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연습124] 사다리

-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와 오르려는 자가 너무 쉽게 도식화될 때

by leesy

경제학자 장하성 교수는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 관행을 까발렸다. 선진국이 자국의 상품 및 자본시장을 넓히기 위해 자유무역이라는 명분을 걸고 후발국가들에 시장 개방을 압박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결과 후발국들은 자국 산업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선진국 상품의 소비처이자 확장된 자본시장으로 전락한다. 10년여 전 유행한 이 개념이 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비판자들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사다리 걷어차기의 전형이라고 지적한다. 집값도 그리 높지 않고, 대출 이자도 낮던 시기에 쉽게 내 집을 마련한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주택 구매를 방해한다는 주장이다. 집값은 계속 오르면서 기성세대는 자산을 쌓아가는데, 주택 대출은 제한한다. 청년들은 영영 집을 구매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서 마지막 사다리로 여겨지는 암호화폐 시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부는 이 마저도 규제를 하겠다고 한다. 빈틈없는 사다리 걷어차기인 셈이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유동성 증가에 따른 집값 상승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한껏 오른 집값을 지불하기 위해 감당 불가능한 대출을 허가해주기보다 집값을 하향 안정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해명이다. 암호화폐 규제는 안정성도 실용성도 증명되지 않은 가상자산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정부의 정책은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이들과 오르려는 이들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로 도식화될 때 가려지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은 그 어떤 세대에도 충분한 자산을 몰아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몫마저 꽉 쥔 채 놓지 않고 있다는 듯한 세상에 대한 묘사는 세대를 넘어서는 경제적 양극화라는 본질적 문제를 가려버린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일삼는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패권국 미국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며 자유무역으로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했다. 미국의 상품과 자본은 국경을 넘나들었고, 몇몇 국가는 미국의 소비시장 혹은 자본의 사냥터로 전락했다. 그 덕에 미국은 더욱 부자나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내 부의 편중도 덩달아 심해졌다. 미국의 중산층은 저렴한 외국의 노동시장에 일자리를 빼앗겨 쪼그라들었다. 전문가들은 미국 내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졌다고 진단한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국제 관계를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말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국내 상황을 설명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와 오르려는 자가 너무 쉽게 도식화될 때 복잡한 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럴수록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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