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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연습126] 노매드랜드

- 유랑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

by leesy

"유랑이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이스라엘이 1948년 필레스타인 땅을 탈취한 뒤 쫓겨난 수백 만의 팔레스타인 피난민 중 한 명이었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선언문'을 작성할 정도로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힘썼던 그는 말년에 쓴 시 <이방인을 위한 침대>에서 유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평생을 팔레스타인의 정주(懷疑)를 위해 투쟁했던 시인이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체념한 듯 인간은 유랑해야 하는 존재라고 노래한 것이다.


우리는 정주를 욕망한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정주의 역사는 지극히 짧았다.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수렵채집을 하며 유목 혹은 유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정주하는 삶은 식량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고, 공간을 더럽혔다. 그 때문에 식량 자원이 재생되고 오염된 땅이 회복되는 주기에 맞춰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그러다가 농업혁명을 계기로 정주문화가 탄생했다. 직립 보행을 시작한 이래로 대부분의 시간을 유랑하며 보낸 인간이 정주의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한 지 불과 1만 년 남짓된 것이다.


정주는 곧 점유로 이어졌다. 말뚝을 박고 땅의 소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주인 없는 땅을 유랑하던 인류는 이제 쓸모 있는 모든 땅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이름표를 붙이기에는 땅은 좁기 만하다. 나의 정주는 곧 너의 추방을 의미했다.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유랑을 이야기한 다르위시는 똑같이 이스라엘인들에게도 유랑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정주하지 말고, 점유하지 말고, 남을 추방하지 말라. 우리는 원래 유랑하는 존재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추방당한 이들의 이야기다. 21세기의 유목민들은 경제적 어려움, 상실감, 권태 등으로 인해 정주문화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은 차 한 대에 의지한 채 미 대륙을 떠돈다. 주인공 펀(Fern)도 한때는 정주민이었지만 낡은 벤에 의지한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삶으로 밀려났다. 직장, 사랑하는 남편, 집을 잃은 뒤 정주민의 삶에서 추방당했고, 간헐적 수입에 의존하며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고 추방당한 이들의 삶이 비참한 것은 아니다. 좁고 열악한 차 안에서 숙식하며 단기 일거리로 영위하는 생활이지만 정주민처럼 값아야 할 주택대출은 없다. 약간의 여유만 생기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난다. 불안하고 외로운 삶을 견디기 힘들 땐, 자신과 같은 유목민들과 연대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다르위시의 말마따나 유랑하는 존재로, 남을 추방하지 않는다. 정주문화에서 밀려났던 펀은 어느덧 정주를 거부하고 유랑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에게 유랑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 부동산을 신봉하는 우리의 문화에서 정주 외의 삶은 그려지지 않는다. 고작 1만 년 된 정주문화가 본래 인류에 내재된 본능처럼 여겨지는 샘이다. 이러한 문화를 회의(懷疑)하는 목소리는 위선자로 낙인찍힌다. 오르고 오른 집값으로 부자됨을 자랑하는 시대. 다르위시의 바람처럼 유랑함으로써 추방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점유와 정주가 누군가의 추방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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