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영화] 거미집의 성(1957)

-타인의 욕망 욕망하기

by leesy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가 1943년 주창한 ‘욕구단계설’은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이론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인간의 욕구는 5단계이며 욕구의 강도에 따라 위계가 나뉜다.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돼야 다음 단계의 욕구로 이동할 수 있다. 1단계는 ‘생리 욕구’다. ‘배부르고 등이 따뜻한’ 상태를 갈구한다. 성욕의 해소도 생리 욕구에 해당한다. 2단계는 ‘안전 욕구’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 안전이 확보되면 3단계 ‘애정 욕구’가 찾아온다. 타인과 관계 맺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다. 4단계는 존중받고자 하는

‘존경 욕구’,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지아실현 욕구는 다른 욕구와 달리 해소되지 않고 계속 증대된다. 욕구는 때로 욕망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곤 하지만, 그 둘의 쓰임은 명확히 다르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는 친절하게 둘의 의미를 구분한다. “욕구는 희망보다 조금 더 바라는 것을 일컬으며, 욕망은 욕구보다 바라는 것이 지나쳐 ‘부족’을 느껴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것을 탐하는 것.”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처럼 욕구와 욕망 사이에도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욕구단계설의 끝단이 채워질 수 없는 '자아실현 욕구'라면, 이 욕구는 욕망으로 진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아실현 욕구는 채움이 아닌 절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사는 없다.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다.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 일찍이 노자는 2600여 년 전 지나친 욕망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 바 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으로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 사례는 역사서에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이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부정부패한 정치인과 관료 혹은 누군가 피땀 흘려 번 돈을 탈취하는 금융사기범들.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이들이 채우고자 한 욕망은 생리 욕구나 안전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채워질 수 없는 자아실현 욕구가 욕망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아실현'이란 무슨 의미일까. 모든 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 속 이데올로기의 포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자아실현이 진정한 의미의 자아를 실현하는 일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특정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자신만의 자아를 찾는 일은 고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는 삶의 모범 답안을 마련해 놓는다.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유명 대학에 입학해서 돈을 많이 벌고 비싼 집에서 사는 삶의 궤도를 바라지 않을 수 있는가. 그 궤도 안에서 자아는 형성된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말마따나 인간이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이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를 영화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거미집의 성(1956)>은 이같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큰 참사'에 휩쓸린 인간군상에 대한 영화다.



#중세 일본. 주인공 와시즈 타케토키와 미키 요시야키는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다. 성주는 공을 치하하기 위해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거미집의 성'으로 두 장군을 부른다. 둘은 여러 차례 가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헤매다가 숲속에서 불가사의한 노파를 만난다. “인류는 인생을 자신을 드러내며 욕망이라는 화염에 자신의 살을 태워 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음침한 노래를 부르는 노파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대가로 두 장군이 받게 될 상과 그 후의 미래를 예언한다. 예언의 핵심은 와시즈와 미키의 아들이 거미집의 성의 성주가 된다는 것이다.



#와시즈는 터무니없는 노파의 예언에 분노한다. 주군을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파는 말한다. “인간은 이상도 하지. 자신의 진심도 잘 몰라.” 노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거미집의 성에서 와시즈와 미키는 성주가 하사한 상이 노파의 예언과 일치한 사실에 놀란다. 예언이 실현된 사실을 전해 들은 와시즈의 부인 아사지는 와시즈의 결단을 강요한다. 와시즈는 아사지의 강요를 뿌리친다. 자신이 거미집의 성의 성주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예언을 부정하고 현실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사지는 답한다. “남자라면 그런 꿈을 꿀 수도 있지요” 아사지는 와시즈가 스스로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며 반역을 부추긴다. 와시즈의 욕망이 꿈틀댄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1단계부터 4단계 욕구를 모두 충족한 와시즈가 언제든 욕망으로 비화할 수 있는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이때 와시즈의 자아란 아사지에 의해 강요된 자아다. 또한 당대 이데올로기의 포섭된 자아이기도 하다. 중세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남성에게 강요되는 가치는 대망(大望)이다. 큰 권력을 손에 쥐는 것. 이렇게 한번 주입된 자아는 멈출 줄 모르고 폭주한다. 와시즈는 결국 자신의 본래 자아가 무엇이었는지는 잊어버린 채 정체 모를 노파와 아사지로 상징되는 사회가 강요하는 자아에 포섭된다. 이제 와시즈가 유지하고자 했던 평온한 삶은 ‘현실 안주’ 따위로 격하된다. 그것은 사내대장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요된 자아가 심긴 와시즈는 경주마처럼 달려간다. 세상 모든 것은 욕망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된다. 확증편향에서 허우적대는 나머지 의미 없는 새소리마저 욕망을 부추기는 듯 들려온다 ‘까악- 까악- 세상을 차지하세요! 세상을 차지하세요!’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모든 것에 눈을 감고 멋대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결국 와시즈는 반역을 일으켜 성주가 되는 데 성공하다. 그러나 성을 차지한 기쁨도 잠시, 와시즈와 아사지는 노파의 예언이 실현돼가는 것이 불안해진다. 마지막 예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미키의 아들 또한 성주가 된다는 것. 와시즈는 예언에 따라 성주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아사지 혹은 당대 사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와시즈에게 남은 일은 미키와 그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타자의 욕망이 허용하는 욕망이 아니다.



#말년에 매슬로우는 욕구단계설에 6단계 욕구인 ‘자기초월 욕구’를 추가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고자 한다. 즉 자기를 희생해 이타적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강요된 자아에 포섭되기 전 와시즈에게 자기초월 욕구로 진입할 여지는 남아있었다. 그러나 와시즈는 결국 타자의 욕망에 휩쓸린 채 생을 마감한다. 타자의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거미집의 성>을 통해 가끔은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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