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지 않고 다가가기
#“타인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눈 색깔마저도 보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나’라는 존재의 근거를 타자에게서 찾고자 했다. 때는 20세기 중반. 전쟁의 상흔이 깊게 남은 유럽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역사를 복기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에 따라 발전한 서양철학이 자기중심적이며 타자를 배제하는 결과를 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전체주의가 탄생하고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게 레비나스의 진단이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를 바라보지 말고 타자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 색깔마저 보지 않아야 한다. 보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고 판단하는 것은 편견을 갖게 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타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그게 쉽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다. 많은 지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은 바쁘다. 확실한 보상이 없다면 그만한 노력을 들일 이유가 없다.
#바라봄으로써 생긴 거리감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거리감이 편견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편견은 명시적 편견과 암묵적 편견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명시적 편견은 의식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편견이다. 2018년 제주도에 상륙한 예멘 난민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한국 사회는 이들의 난민 지위 인정 여부를 두고 둘로 쪼개졌다. 난민 지위 인정에 반대하는 쪽은 예멘인의 다수가 믿고 있는 이슬람교가 내재한 폭력성을 근거로 들었다. 그 폭력성이 한국 사회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명시적 편견이 작동한 사례다.
#반면 암묵적 편견은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한다.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연구팀은 의사들을 대상으로 인종에 따라 진단과 처방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의사들이 유색인종보다 백인에게 더 많은 진통제를 처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반면 해당 의사들은 객관적으로 진료를 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명시적 편견은 보이지 않았으나 암묵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문화적으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장기간 축적된 차별의 경험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깊게 각인된다. 이는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2012)>는 시선이 낳은 편견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명시적 편견과 암묵적 편견 참고: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01)
#“35년을 이렇게 산 건 죄악이야.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훔친 거라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교사 로렌스는 고뇌에 빠진다.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남자’의 모습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억눌려왔던 진짜 자아를 해방시킬 것인가. 그의 진짜 자아는 ‘여자’가 되고 싶다. 이제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삶의 기로에 선다. 로렌스는 결국 훔친 인생을 되돌려주기로 한다. 그는 이 결정을 오랜 연인 프레드에게 고백한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 로렌스에게 게이이면서 자신을 속여왔다고 화를 낸다. 하지만 로렌스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로렌스가 양식화된 삶의 범주에서 멀어지는 순간이다. 그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 안으로 입장한다. 시선 안에 들어온 이상 그에 대한 편견은 켜켜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진짜 자아의 해방을 선택했다. 그러나 억눌려왔던 자아를 해방하는 것을 선택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로렌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시선의 메커니즘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의지를 가리지 않고 작동한다. 로렌스의 여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할 각오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로렌스는 단지 여장을 했을 뿐이지만 친하게 지내던 주변인들의 괄시를 받고, 잘 나가던 직장에서 해고되고, 애인에게 버림받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한다. ‘궁금해서’ 혹은 ‘특이해서’ 바라보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시선의 함의는 호기심의 탈을 쓴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 항의하는 이는 옹졸한 인간이 된다.
#사람들은 그를 ‘특이’한 존재로 바라본다. 로렌스는 “특이하다는 건 피카소 그림을 보고 이해를 못 할 때나 쓰는 말이야”라며 따진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로렌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르기 때문에 편견의 낙인을 찍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로렌스를 이해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공고하게 쌓인 전통과 관습이라는 문화의 장벽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너뜨릴 이유가 있는가? 로렌스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람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가? 레비나스의 말마따나 바라보지 않고 다가감으로써 공동체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하지만 즉각적인 효용이 없다면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전통과 관습에 따른 삶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가 설정한 규격이 있다. 그 규격에서 벗어난 사람은 돌연변이로 취급을 당하곤 한다. 오늘날 이러한 규격화는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지고 있음에도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는 찾아오기 마련이고, 우리 사회가 그 규격의 고리가 점차 느슨해지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고리를 넓히는 이들은 변화의 선발주자로서 전통과 관습의 저항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한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받은 로렌스는 이 말을 남기고 직장을 떠난다. <신약성서>에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는 예수를 가리키면서 뱉은 말이다. 로렌스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고통받는 예수에 빗댄다. 그만큼 괴롭다는 의미이면서도 언젠간 자신을 세상이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예수는 한번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드러냈다. 로렌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함으로써 고통의 결실을 맺고자 한다. 그 결실이란 ‘어쨌든’ 로렌스가 되는 것일 테다. 남장을 하든 여장을 하든 로렌스는 로렌스일 뿐이라는 당연한 진리. 명시적이며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갈지(之) 자를 그릴지언정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이미 ‘선’을 넘었다고 말한다. 틀렸다. 로렌스는 선을 긋는 사람이다. 그가 넓힌 사회의 규격은 ‘어쨌든’ 로렌스가 되는 것 이상이다. 바라보는 사회가 아닌 다가가는 사회를 만드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