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학점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한국 사회에서 출신 고등학교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학교 위치는 그 사람의 사는 곳에 더해 가정의 형편을 짐작케 한다. 자율형사립고등학교와 특수목적고등학교는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다. 부모의 재력 없이 비싼 등록금과 입시 경쟁률을 뚫기 위한 사교육비를 감당하기는 힘들다. 평균적인 소득의 가정이 자식을 자사고와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자사고와 특목고는 교육의 수월성과 다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수월성과 다양성의 가치는 어느새 대입이라는 좁은 목표로 쪼그라들었다. 교과 편성의 자율성은 대입에 유리한 교과 과목의 편성권으로 전락했다. 애초에 비싼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가정의 상위권 학생들을 모아 대입에 특화된 교육을 하면서 만들어낸 대입 성적이 일반고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특목고와 자사고는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가 됐다.
자사고와 특목고는 설립 시점부터 교육 양극화의 우려를 안고 있었다. 이미 아이들은 부동산 가격에 따라 분화된 지역에서 자란다. 고등학교 입학은 경제적 계층에 따라 분화되는 삶의 공간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한다. 공간이 분리되면 공유할 경험이 사라지고, 상호 공감의 영역이 쪼그라든다. 고입에서 시작된 삶의 분화는 대입과 취업까지 연장되고, 심화된다.
능력 있는 부모의 지원을 받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물을 수 있다. 잘못은커녕 합리적 선택이다. 자사고와 특목고 진학이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현실은 이미 자명하다. 자신의 계층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도, 한번 떨어지면 다시 오르기 힘든 계층 구조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발버둥 치는 학생의 노력도 모두 합리적이다.
하지만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합리적 사회를 만들지는 않는다. 합리적 사회란 계층에 상관없이 교육의 질을 보장받고, 계층 간 이동이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자사고와 특목고가 계층 분화를 심화하고 있는 사실은 명징하다. 2025년 자사고와 특목고를 일괄 폐지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평등한 교육과 계층 간 이동성 강화를 향한 의지인 셈이다.
그럼에도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자사고와 특목고에 보내려는 이유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 기저에는 일반고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일반고가 자사고와 특목고에 비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을 없애는 노력도 필요하다. 정부는 자사고와 특목고 폐지 무렵 고교학점제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학생이 자신이 희망하는 과목을 골라 수강하면 교육의 수월성과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고교학점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