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봉은 글씨의 천재였지 행정의 천재는 아니었다
한석봉은 '글씨'의 천재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해 박연폭포가 먹색이 됐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한석봉은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선조는 한석봉의 글씨를 높이 사 여러 행정 관료직에 그를 앉혔다. 당시 한석봉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칙상 맡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한석봉이 글씨도 잘 쓰니 행정도 잘하리라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신하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에게 대접이 후하다. 특히 의료인과 법조인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각종 매체에 의학과 법학 분야의 전문 지식을 뽐내는 것은 물론 그 외의 분야에서도 고언을 요청받는다. TV와 신문은 이들에게 마치 선조가 한석봉을 생각하듯 교육·정치·외교·경제 등 광범위한 전문분야에 대해서도 권위를 부여한다. 그래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은 어찌 됐든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런 일이 공적 영역에서 벌어질 경우 많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어제 서울 중앙지법 민사합의 1심 재판부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이 소송으로 청구권을 실현할 권리는 상실했다는 궤변을 펼쳤다. 3년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과도 배치되는 기각 판결이라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재판부는 법의 영역을 넘나들며 기각을 합리화했다. 판결문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들어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된다"거나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헌법상 안전보장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기각 사유를 전했다. 외교·안보·경제적 고려까지 포괄한 판결문은 재판부의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고민의 결과물처럼 보이기보단, 법 전문가의 자의식 과잉으로 비칠 뿐이다.
하지만 법 전문가로 보기 힘든 태도는 또 다른 문제다. 당초 10일로 예정됐던 선고 기일은 7일로 갑작스럽게 당겨졌다. 소송 당사자 대부분이 고령인 점과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소송인의 재판 참여를 방해한 행위와 다르지 않다. 재판부는 '법원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한 결정으로 위법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궁색한 변명이다. 이례적으로 선고 기일을 앞당김으로써, 소송인의 권리를 침해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재판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를 대하는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 사회는 법의 전문가로서 사법부에 막강한 권한과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재판부가 해야 할 일은 공정하고 엄정한 법의 집행이다. 논란의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설익은 외교·안보·경제 분야의 지식을 과시하지 말고, 법원은 법원의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가평군수직을 맡은 한석봉은 군정을 말아먹고 탄핵당했다. 한석봉이 글씨의 천재였지 행정의 천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