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인간을 좀먹는 행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말이다. 곤란한 이슈를 피하는 전가의 보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의 충분과 부족은 전적으로 자의적 판단에 따른다.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법안도, 일부 지지층의 강한 반발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기 일쑤다. 그 법안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질 때도 마찬가지다. 국회 국민 동의 청원 10만 명을 넘겼지만, 여전히 표류 중인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벌금지법은 성별·나이·장애·국적·종교·학력·성적지향·외모·고용형태 등 21가지 사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90% 가까이가 차별금지법에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가 거세고 정치인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입법이 지연되는 양상이다. 입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때면 정치인들은 시기상조론을 꺼내 든다. 하지만 정치인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지,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는 멍석이 아니다.
게다가 차별금지법은 이미 17·18·19대 국회에서 꾸준한 입법 시도가 있어왔다. 이제 와서 시기상조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잇단 입법 지연에도 계속해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요구되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 일상의 차별이 여전히 만연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차별을 하자는 법도 아니고, 하지 말자는 법의 통과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특히나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유력 야당 대표가 능력을 가리는 차별을 방지하는 법안에는 눈을 감고 있는 형국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 정도다. 과반 이상 국가들이 동성혼도 허용하고 있다. 미국 US뉴스는 ‘2021 전 세계 국력 랭킹’에서 한국의 국력을 8위로 집계한 바 있다. G8으로 불릴 정도로 국가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행복지수 OECD 3개국 중 35위인 이유에는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는 남루한 현실이 있다.
게다가 차별금지법은 법적 처벌 없는 선언적 조치에 불과하다. 채용과정, 서비스 혹은 행정기관 이용 때 발생하는 차별을 막겠다는 의도의 법으로 반대자들의 우려와 달리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입에 반대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용인하겠다는 말과 같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은 “시간은 약자의 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차별금지법 도입이 미뤄질 때마다 소수자들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계속 유예되고 있다. 차별은 사회적 인간을 좀먹는 행위다. 이만하면 사회적 합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