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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울림 Jun 19. 2024

미국 의대에 입학한 한국인 pt. 2

어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주의*

왕따에 대한 묘사 및 회고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으신 분이고 아직 직면할 준비가 안 되셨다면 읽지 않음을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제가 감히 덧붙이자면 당신의 잘못이 아니기에 당당하고 밝게 당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피해자가 아닌 그 경험을 했음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니 스스로를 불쌍해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워하시면 좋겠습니다 :)




2006년 인생 첫 유학, 캐나다 1년.

정확히 10년 후, 대학교 교환학생 신분으로 간 미국 1년.


교환학생을 가게 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연극/연기를 배우기 위해서,

본질적으로는 나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나의 공허가 무엇인가 설명하려면 나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쉬이 나의 공허를 정의할 수도, 그것의 근원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도 여전히 어렵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가끔은 나를 괴롭히고는 한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더니 내가 왕따를 당했다는 과거를 남들에게 알리고 나 자신도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용기 내서 나의 가장 아팠던 시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공공 공간에 글쓰기 자체도 용기인데 이 이야기를 하려니 타자를 치는 손 끝이 차갑다.)


나는 사실 외고에 가기 싫었다.

캐나다에 갔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받아오던 사람이었는데 일 년의 외국 생활은 나의 수학을 극명하게 늦춰버렸고 어린 나이에 나는 이과를 포기해야 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실패이자 좌절감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의 꿈은 자주 변하지 않는가.

(아니, 꿈이라기보다 바라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미래의 직업이라는 게 더 옳은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누군가를 지켜주는 꿈을 꿨다.

경찰 혹은 군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워낙 아기들을 좋아해서 소아과 의사를 꿈꾸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이과 즉, 의사를 포기해야 한다 깨달은 순간은 절망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 분만 맨발로 걸어가면 바로 다다르던 바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던 캐나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던 나는

나의 고향 서울과 그 속의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상처받고 있었다.


빌딩들이 즐비해 답답한 도시,

길거리에서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직접 보고 경험하게 된 동갑내기들의 추악함. 

(물론 서울에 나쁜 아이들만 있었던 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중학교 때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하지만, 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기억나는 동급생의 성희롱, "은(근히 왕)따" 시도, 싸움과 왕따 이간질 등의 여러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혐오가 생겨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예술에 빠졌다.

예술은 상처받은 내게 유일한 은신처였다.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고 뮤지컬과 영화를 좋아했다.

노래를 듣고 자유로이 춤을 떠올리고, 누군가의 진실된 연기를 보고 있노라 하면 내 마음이 위로받았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나는 부모님과 처음으로 크게 마찰을 겪었다.

예고에 가고 싶다는 나, 외고에 가라는 엄마.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들이 오갔지만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자신, 경험도 없던 나는 어느새 외고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원치 않던 작은 업적이 생겼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학창 시절 인기가 많았는지 이해가 안되는데) 학교에 가자마자 회장을 하고 소위 말해 학우 관계가 아주 원만했다.

불편할 정도로 나를 떠받드는 동급생들도 생겼다.

모범생들이 가는 외고 안에서 (그나마) cool한 그룹이라는 댄스 동아리도 들어가고

치어리딩도 하고 회장도 하다보니 나는 그 작은 세계에서 누군가의 우상이 되어있었다.


그 와중에 내게 새벽까지 문자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친구가 생겼다.

사실 뭔가 거북하고 부담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나랑 지내고 싶어하는 거지?


하지만 아직 어렸던 나는 그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그 친구와 어울리며 함께 다니는 무리가 생겼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혼자가 되어있었다.


내가 동급생에게 전화로 욕을 하는 무리의 한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했던 것 때문인지,

내가 점심을 계속 따로 먹다가 한 번 다른 친구들 무리랑 먹었던 것 때문인지,

내가 회장으로서 남녀 분리된 학급을 모아보려던 노력이 고까워 보였던 것 때문인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와 제일 친하게 지내려던 그 친구가 왕따 주동자가 되었는지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고3 담임 선생님 덕에 내가 "고고해서" 싫었다고 밝혀졌는데 사실 그걸 이해하는 데에 거의 십 년이 걸렸다.)


우리 반, 다른 반 아이들까지 영향을 받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더 대담해졌다.

국어 시간에 내가 발표할 때만 일부러 무시하고 떠들어대던 아이들을 버텨야 했고,

체육 시간에 먼저 내민 내 손에 대고 나랑 짝하기 싫다며 더럽다며 떠나가는 아이를 못 본 척 버텨야 했고,

화학 시간에도 뒤에서 나와 내 가족 욕을 속삭이는 아이들을 버텨야 했고,

동아리에서도 노골적인 따돌림을 버텨야 했고,

심지어 다른 반이 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굳이 내 반까지 와서 내 자리 앞에서 나를 못살게 구는 걸 버텨야 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안타까운 마음에 만 11살에는 잘만 했으면서 왜 더 나이가 든 고등학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해자들한테 발악 한 번 안 했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첨언하자면 언제나 인기쟁이 모범생이었던 나의 왕따를 믿지 않았던 부모님이 진실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찢어지시는 모습을 보면서 차마 그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그 아이들도 이렇게 나처럼 누군가의 사랑받는 자식이라는 생각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게 현실이 되긴 했지만.)

그래서 무반응을 택했고 그 "고고함"이 그 아이들을 더 부채질했고 어떻게 보면 상황을 악화시킨 것 같다.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여리여리하신 일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하루는 내게 그러셨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러고 있는데.
그냥 병깨라.
선생님이 못 본 척해줄게.


덕분에 용기를 얻어 담임 선생님 종례 시간에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확실히 한동안 괴롭힘은 줄었고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이학년 담임 선생님은 매 방과 후마다 나의 하소연과 설움에 벅찬 눈물을 받아주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인기 최고 선생님이셨던지라 그 인기로 우리 반의 학교 폭력이라는 무거운 상황을 조금은 무던하게 해 주셨다.


위의 두 분도 은인이시지만

미국에 나오기 전까지 매년 스승의 날에 찾아뵙던 선생님은 바로 삼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시다.

(물론 좋은 어른들만 계셨던 건 아니다. 믿었던 선생님들께 SOS를 쳤을 때 농담조로 "너 같이 인기많은 애가 어떻게 피해자야 주동자면 몰라도."라고 했던 선생님도 있었고 진지하게 "학생들의 개인적인 교우관계에 선생님이 낄 수는 없어."라던 분도 있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청소년 친구들 중에 이런 어른들만 주변에 있다면 증거 수집 이후 그냥 당장 경찰에게 갈 것을 추천한다.)


삼학년이 되자마자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뵈러 가도 되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웬만한 고등학생들이면 싫다고 하겠지만 진실을 알게 된 후로 우리 엄마는 학교에 꽤 자주 오셨기에 나는 익숙했다.

(학교폭력 위원회를 열까 했을 때는 거의 맨날 오셨는데 아래 적은 초반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본인들 학교 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다고, 본인들도 생각해 달라고 해서 내가 엄마한테 안 하고 싶다고 했다. 돌이켜봤을 때 그냥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으로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 당시의 친구들을 보호하고 싶었던 나의 순수했던 마음이나 이쁘게 봐주려고 한다.)


엄마는 선생님께 내가 계속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오고 있는데 고3인 만큼 선생님께서 내가 괴롭힘 때문에 입시까지 영향을 받아 더 서글픈 상황이 되지 않도록 부탁드렸다고 한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나를 본인 교무실로 불러내셨다.

솔직히 시간이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본론은 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건 내게 신뢰를 줬던 선생님의 강인한 눈빛이었다.

워낙 귀엽고 동글동글하게 웃상이신 선생님께서 그런 눈빛을 보내시니 뭔가 천군마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의 믿음에 답하듯 선생님께서는 정말 내 편이 되어주셨다.

다른 반이 된 그 아이가 굳이 쉬는 시간마다 내 반을 찾아온다는 걸 안 이후로 귀찮으실 텐데 매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올라와 그 아이를 내쫓으셨다.

마구잡이로 내 편을 들며 혼내시는 게 아니라 고3인데 너희 반 가서 공부하라는 담담한 말투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아이를 제압하셨다.


내 공부에 있어서도 선생님은 단순히 입시 성적을 걱정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나의 성장을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나는 입시 공부 외에 유튜브로 아이비리그 학교의 무료 유명 강의들을 보고 영어 보고서를 썼다.

(여담이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 강의를 하신 예일대의 Shelly Kagan 교수님께 그 보고서를 보내고 답변을 받기도 했다, 본인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보고서가 너무 많아 내 거를 읽지 못하지만 본인이 2013년 5월 SBS 지식나눔콘서트로 내한하니 그때 가능하면 방청을 오라는 것. 나는 바로 이 사연과 함께 SBS에 방청을 신청했고 방청 후 교수님으로부터 책 사인과 아주 짧게 우리의 이메일에 대해 대화 나눌 수 있었다.
인연은 어찌 될지 모르니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 중에 제 사연을 보고 방청권을 주신 작가님이나 PD님이 계시다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의와 죽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는 이과를 못하고 문과로 왔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인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탈 바꿀 수 있었고 

내가 경험하는 일종의 불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관념들을 조금은 더 체계적이고 지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외고 고3 선생님이라면 그런 거 쓸 시간에 수능 공부 더 하라고 하셨을 수도 있는데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신 게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내가 선생님을 은인으로 모시게 된 계기는 쓰라리게 아픈 억울함을 느낀 날이다.


나, 담임 선생님, 내 괴롭힘 주동자, 그리고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 넷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사실, 담임 선생님께서 사자대면을 제안하셨을 때 나는 격렬히 거부했다.

그냥 여태껏 안 좋았던 일들은 잊고 지금 훨씬 조용해진 이 고3 생활을 보내고 졸업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눈빛을 보았다,

한없이 진실된 그 눈빛을.

선생님은 내가 정말 그 사자대면을 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눈빛을 다시 한번 믿었다.


건물 뒤 야외 테이블에서 사자대면이 시작되었다.

그 아이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계속 부인하고 오히려 울면서 내가 잘못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감정적으로 나까지 거기서 울어버리면 내 말의 신빙성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최대한 또박또박 여태껏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내 모습이 밉상이었을까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도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었던 일들을 말할수록 그 선생님은 나에게 계속 질문했다.


네가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함에 말문이 막혀 참아왔던 눈물이 흐르려던 찰나, 

내 담임 선생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다.


우는 그 아이를 똑똑히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oo은 내 이름, xx은 그 아이의 이름이다.)


선생님이 oo이 일 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랑 이야기해 보니깐
oo이가 고고해서 싫다고 했다는데, 맞지?

xx야, 고고한 게 뭔지 아니?

고고하다는 건 저 높은 절벽 위에 홀로 우뚝 서있는 소나무란다.
 

그러고는 이야기 다 나눴으니 일어나자며 나를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과 단 둘이 건물 뒤편에 오자마자 참아왔던 설움과 눈물이 정말 물 밀듯이 터져 나왔다.

털썩 주저앉으며 계속 반복했다.


선생님, 저 억울해요.


선생님께서는 이야기가 본인과 그 담임 선생님이 사자대면 전에 상의했던 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본인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원래 내 담임 선생님께서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그 아이가 내게 잘못했으니 졸업하기 전에 사과시키자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선생님과 학교를 한 바퀴를 걸었다.


그 이후로는 엄마가 나를 학교에 데리러 왔고 너무 울어서 거의 실신했다는 거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그 당시 내 옆을 지키던 친구가 걱정했다며 왜 팥빙수 먹으러 안 왔냐고 하는 건 기억난다.


비록 나는 왕따였지만 담임 선생님들께서 각자 내게 다른 단단한 보호 장벽을 쳐주셨듯이

한 학기 학기, 학년 학년이 지나가면서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이 있었다.


이 친구는 특유의 그 누구보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정말 내 숨통을 트이게 해 준 친구였다.

그 친구 덕에 내 억울함을 알지만 물타기를 하던 친구들이 돌아왔고 무엇보다 그 친구의 존재는 내게 우정을 다시 꿈꾸게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친구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졸업하고 나서 방황하던 내게 큰 상처를 주어 관계가 자연스레 정리되었다.

(이 친구에게는 여전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고 계속 그럴 것 같다. 함께 한 시간 동안 제일 절친한 친구였다 보니 이 친구를 내 삶에서 정리하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 아프고 힘들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


그전에는 함께 셋이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한 명은 알고 보니 그런 나를 보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던 사람이었고 결국 나를 아주 매정하게 배신했다.

(아직도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한테 데려가서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자고 하고 아부를 떨던 모습, 그 친구가 결석한 날 내가 대신 교과서에 수업 필기를 했다고 했을 때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쫙쫙 지워버리던 모습, 내가 쓴 손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조각내 쓰레기통에 버리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지금쯤이면 조금은 더 선한 사람이 되었길.)


다른 한 명은 위의 친구와 같이 지내던 트리오 중 한 명이다.

위의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나서도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새로운 친구와 셋이서 야자 시간에 까르르 웃으며 노는 여느 여고생 같은 시간도 보내게 해 준 친구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만났을 때 나 때문에 고등학교 생활이 힘들었다고 울며 탓을 했어서 결국 보내주게 되었다.

이 친구의 경우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내가 믿었던 그 친구의 우정이 사실은 연민이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본인의 아픔도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내게는 더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이 친구와의 그 저녁 이후, 집에 돌아와 가족 앞에서 정말 말 그대로 목이 찢어져라 엉엉 울었고 내 이름 석자를 부르던 고등학교 때의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잊고자 개명을 결심하게 됐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이름 신기하다고 원래 이름이냐 물어볼 때마다 개명했다고 답하면 그에 대해 "왜"를 물어보는데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라고 답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농담조로 "뭐야, 왕따 주동자나 일진 이런 거였던 거 아냐?"라고 하면 "그 완전 반대, 피해자에 찌질한 너드였습니다."라고 하면 아주 싸해지고는 했다. 나쁜 마음으로 물어본 건 아니겠지만 완전 남이면서 꼬치꼬치 본인의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질문하는 오지랖이 나는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답하는 게 나도 편하지 않았지만 웃어 넘기지 않고 일부러 더 냉하고 솔직하게 답했었다.)


이런 여러 아픈 경험들을 겪고 나니 내 마음은 공허로 가득 찼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내도 내 마음은 공허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존경하는 아빠가 다녔던 대학 후배가 되었고,

그 주동자 아이가 가고 싶던 학과도 가고,

그 힘들다던 "수시 올킬"도 해서 담임 선생님께서 일부러 소문 내주시면서 나 대신에 통쾌한 복수도 해주셨는데

(그 아이는 내가 본인이 원하던 학교, 학과 서류 1차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본인은 떨어질까 봐 지원도 못했는데 내가 붙었다고 "면접 2차도 붙으면 자살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본인 반에서 울었다고 한다.. 그 행동 때문에 이미 입시 때문에 예민한 많은 아이들이 그 아이에게 등을 돌리고 더 이상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진모습이 언젠가는 알려질 줄 알았다.)


나는 공허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생회, 과대표, 각종 대외활동을 했지만 여전히 공허했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도 외로움과 공허함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교내 중앙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집이 되었고 그 집에서 나는 연극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기예술은 내 숨통을 틔워주었다.

연기를 통해 나를 표현하면서 나는 조금씩 치유받았고

다른 이가 되어 그 사람의 삶을 살고 공감한다는 것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자연스레 연기예술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모교에는 연극/연기 수업이 없어서 교환학생을 가서 이를 학구적으로 배워보고자 했다.

거기에다가 언제나 캐나다를 그리워하고 영화 속 미국의 삶을 동경하던 나는

북미로 교환학생을 지원했고 나의 노력과 운의 결과로 제일 원하던 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간 열심히 연극과 퍼포먼스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새로운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마침 내가 갔던 학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아주 진보적인 곳이라 연극/연기 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워온

인생의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럼에도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깐 결국에는 모른 척 외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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