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epilogue-
나의 공허를 외면하면서 나는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았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전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도 많이 치유하고,
꽤나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조금 더 단단하고 멋진 인간이 되었고,
여러 학문들을 공부하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견문도 넓혔다.
그렇게 살다 보니 현대 사회의 성인식과 같은 날이 왔다,
대학교 졸업.
어른이 되는 시기.
두려움이 앞을 가릴 수밖에 없는 시기다.
허나, 나는 무모하면서 오기로 가득한 사람이라 일단 배수진을 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
누군가를 돕고, 치유하고, 위로하면서 나의 공허를 채우는 삶.
한 때 나는 배우로서 나의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싶었다.
내가 치유받았듯이 그렇게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작품, 연기만 하면서 살 수 없는 실상이었다.
배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지만 연기를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미투 운동 덕에 연극계의 성/위계폭력이 밝혀지면서
그 바닥에 대한 진절머리가 나고 한 여성으로서 그 영역이 무섭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만큼 연기에 절박한 게 아니었던 거라고 도망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해 보았고 진심으로 대했었기에 다행히 후회는 없다.
(무엇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나 스스로에게 당당한지가 더 중요하니.)
나는 여전히 연극과 연기를 나의 순수한 마음으로써 사랑하고 언제나 그리워할 거다.
그곳을 한 때 동경했던 사람으로서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존중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내가 사랑하던 것이 나의 길이 아니라면 내가 잘하는 걸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닥치는 대로 여러 기업에 지원했다.
대기업, 스타트업, 마케팅, 기획전략 상관없이 문을 두드렸다.
뭐든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마치 게임 레벨업을 위해 도장깨기 하듯이 나의 힘을 키웠다.
그러다 당시 문과 학위 졸업생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 영역을 도전해보고자 했다.
굳이 최고까지 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오는 현실적인 여유를 토대로 나 자신의 공허를 채울 시간과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배우의 경우 이상을 현실로 가져오려는 시도였다면 이는 현실과 이상을 철저히 분리하되 현실을 도구로써 이용하여 이상에 다다르는 시도였다.
한국에서 문과의 최고는 로스쿨.
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 법 수업을 한 번 듣고 '이건 정말 내 영역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빠르게 그 외의 문과 최고를 탐색했다.
결론은 외국계 컨설팅 기업.
여러 곳과의 인터뷰 끝에 들어가게 된 곳은 악명 높은 외국계 컨설팅 기업에 걸맞지 않은 외국계 컨설팅 기업이었다.
그곳에 계신 선생님들은 직급 상관할 것 없이 모두 본인만의 방식으로 따스하셨다.
그중 여전히 연락드리고 한국에 가면 뵙는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 그 당시 이사님으로 내 의대 추천서까지 써주신 감사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당시 내 사수 선생님이시다.
카리스마 넘치는 츤데레 스타일의 사수 선생님과는 인터뷰 때 처음 만났다.
선생님의 기운에 눌려 내가 너무 긴장해서 어버버 거리면서 문제를 잘 못 풀자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보시며 다른 테이블 가서 조용히 풀고 다시 와서 설명하라고 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 눈빛에 소위말해 쫄았지만
사실은 두 번째 기회와 차분함이라는 중요한 조언을 주신 것을 알았기에 덕분에 나의 실수를 만회했다.
입사한 후에도 츤데레 선생님의 시크한 존중은 계속되었다.
하루는 주어진 일을 다 끝내고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oo 선생, 주어진 일은 다 했나?
네.. 다른 분들께도 여쭤보니 지금은 도와줄 게 없고
나중에 생기면 알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책 읽어~
간단한 질문 하나 후 쿨하게 내 괴짜 MZ 신입사원 같은 행동을 이해해 주신 선생님.
(저 답변드릴 때 점점 눈치 보면서 책을 스르르 덮고 자세 고쳐 앉았던 것까지 기억나는 아찔한 순간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의 내가 미쳤나 보다 싶다. 사실 그 당시 진로랑 어른으로서의 삶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독서만이 내 탈출구였어서 시간이 나는 틈마다 어떻게든 책 속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그런 앙큼한 짓을 했다고 변명.. 하고 싶다.)
그 당시 아찔한 MZ 신입사원 같은 나는 책 읽기 외에도 기괴한 행각을 벌였는데
일하다가 잠깐 쉴 때마다 파티션 뒤에 숨어서 스트레칭을 한다거나
나보다 높은 직위의 선생님들께서 야근하시고 다른 팀 선생님께서 좀 있다 가라고 할 때도 칼퇴근을 했다.
(아, 그 때 마침 노동부에서 큰 기업들의 지나친 야근을 잡던 때라 좀 더 편히 칼퇴를 했다. 운이 좋았다.)
물론 조금 당돌했어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
일 다 끝내면 선생님들께 더 일 없는지 확인하고 눈치 조금 보고 90도 인사 후 사무실을 나가고는 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일들 때문에 조금이라도 밉보여서 빌미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나를 존중해 주시는 선생님들 덕에 그런 두려움을 조금 극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편하고 좋은 분들 사이에서 새로운 일을 배우는데도
신이 난다거나 컨설팅에 대한 없던 열정에 불이 붙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루종일 말도 한마디 잘 안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회사에 있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을 읽어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그 기분에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잊고 살고 싶었던 나의 공허가 다시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다시 직면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왜 공허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나의 공허를 채울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머릿속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다가 득도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그 답이 있었다.
누군가를 돕고, 치유하고, 위로하면서 나의 공허를 채우는 삶.
그렇다면 내게 만약 인생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누군가를 돕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싶은가.
힘들게 내린 결론이자 방법은 어렸을 때 포기해야 했던 의사라는 꿈이었다.
다른 이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고 한 명의 다른 인간으로서 그 옆을 지켜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이상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God complex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한다. 언제나 겸손할 것.)
두려웠다.
수학 교육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어린 나이에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내가 이제야 이과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대학까지 다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고 있는데 굳이 말도 안 되는 도전을 해도 될까?
하지만 절박했다.
내가 바라는 나의 삶, 공허가 채워진 나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서
나는 그 땅을 밟아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퇴사 후, 나는 결국 가족과의 진솔한 대화를 하며 그 길을 한 번 걸어보기로 하였다.
사실 우리 가족은 내게 마지막 의전원 기회를 도전하라고 했다.
(특히 오빠는 내 대학생활 내내 의전원에 지원하라고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어린 시절 이과를 포기해야 했던 패배자 주제에 불가능하다며 나 자신을 불신했다. 그리고 또 다른 실패가 너무 두려웠다.)
그런 가족에게 나는 뚱딴지 같이 미국 의대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비록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언제나 외국인 같았다.
한국에서 살면서 내 가치관과 신념을 나누는 사람들이 없다고 느껴졌다.
내 가치관을 발설하면 나는 "예민하고 별난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하지만 어릴 적 경험했던 캐나다와 교환학생을 통해 경험했던 미국은 서울보다도 내게 오히려 더 고향 같았다.
연고 하나 없는 이국에서 느꼈던 소속감과 해방감은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물론 내 가족은 내가 얼마나 한국에서의 삶을 힘들어하고 답답해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고
2020년 나는 가족의 사랑과 지원을 토대로 미국에서 생물학과 학부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미국 의대의 경우,
전공은 상관없지만 일련의 필수 수업들(수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등)을 듣고
(우리나라의 의대 예과 2년을 미국은 학부생 4년 중 저 필수 수업들을 들으면서 충족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MCAT이라는 의대 입시 시험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 외에도
학부생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경험과
clinical (환자와 직접 대면하며 일하는) 경험,
그리고 봉사, 리더십, 수상경력, 취미 등의 여러 경험,
마지막으로 미국 입시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최소 3개의 추천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속에서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잘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절대 만만하지 않은 경로다.
하지만 나는 절박했다.
이과 공부를 손 놓은 지 수년이 되었으니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에 나는 절박하게 공부했다.
외고 때도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서 처음 이과 공부를 하면서 그 한계를 깼다고 생각할 정도로 했다.
그렇게 공부하다가 미국에 온 지 2개월 만에 심하게 아파서 생사를 오갔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아프기 2주 전에 만난 미국인 남자친구가 내 못 볼 꼴을 봐가면서 나를 열심히 간호해 줬고 우리는 2년이 조금 지나고 나서 결혼했다 :) )
코로나 때문에 연구 및 clinical 경험들이 늦춰졌다.
마음이 불안해서 이곳저곳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런 나의 심경과 상황을 알아채고 괴롭힌 어른들 때문에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지만
내 꿈에 절박했기에 버티고 버텨 경험을 쌓았다.
사실 공부와 일이야 그냥 하면 된다.
말했듯이 나는 종종 무모하고 오기가 있는 사람이라 내가 온전히 책임져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끝을 보는 것에 자신이 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그냥 하면 됐다.
하지만 실로 어려웠던 건 나의 두려움을 다잡는 것이었다.
매일 너무 불안했다.
이미 한 번 실패했었는데 또 실패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내가 의사가 될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췄을까,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내 꿈 이뤄보겠다고 이기적으로 여기에 온 건 아닐까,
너무 많은 걸 포기하면서까지 여기에 왔는데 또 실패하면 정말 내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두려움이 나를 갉아먹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은 그런 나를 보며 말하고는 했다.
실패해도 된다, 언제든 돌아와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감동의 눈물이 나기는 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한국에 다시 가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늦게서야 힘들게 얻게 된 나의 두 번째 기회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오기가 내게 말했다,
"상"여장부가 칼을 뽑아 들었으니 베려면 칼부터 갈라고.
나의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혼자 사는 스튜디오 아파트에 발을 들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는 했다.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안의 거울에 서서 우는 내 모습을 바라봤다.
참 우는 모습 가관이더라.
그런 내 얼굴을 보니 울음이 멈췄다.
'나 저렇게 못생겼나?'
자아성찰과 영감의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탁상 거울을 주문했다.
이틀 후, 탁상 거울이 도착했다.
소포를 안고 아파트에 들어오자마자 또 자동으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손을 씻고 소포와 책가방을 갖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먼저 가방에서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꺼내고
코를 풀고
소포를 풀고
탁상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울음이 멈췄다.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는데 또 갑자기 울컥하며 울음이 새어 나왔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울음이 멈췄다.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똘끼와 오기의 환장의 콜라보 덕분에
나는 두려움에 인간적인 만큼은 무너지되 아예 잠식되지 않는 무적의 입시생이 되었다.
2023년 1월,
3년 동안의 칼 가는 시기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정말 그 칼로 베어내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 의대의 경우 지원 기간이 최소 1년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1. 그 해의 5월부터 12월까지 미국의학대학협회(AAMC)에 1차 지원서 (primary application)를 제출한다. 이 지원서의 경우 여태껏 준비해 온 모든 걸 제출하는 거다, 학점, 입시 시험 점수, 수많은 경험들, 추천서들, 그리고 딱 한 질문에 답하는 자소서까지.
2. 7월부터 다음 해 1월 중에 나의 1차 지원서를 보고 내가 지원한 의대들에서 2차 지원서 (secondary application)를 제출하라고 초청이 온다. 그럼 각 의대에 그 기간 내에 2차 지원서를 작성해서 제출한다. 그리고 이때 학교마다 인성/적성 검사를 하는 곳들도 있으면 그 시험도 추가로 봐야 한다. 이때 초청이 안 오면 안타깝지만 조기 탈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3. 8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내 2차 지원서를 보고 인터뷰 초청이 오면 인터뷰에 응한다. 인터뷰가 마지막 단계라 만약 초청이 안 오면 후기 탈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4. 이르면 인터뷰 시작 시기인 8월에 바로 결과를 받고, 느리면 다음 해 7월까지도 받을 수 있다. 대부분 합격과 대기를 받았다는 소식이 빠르고 탈락 결과는 받는다.
단계별 시기들이 겹치는 게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는 rolling based admission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선착순 시스템이다.
내가 빨리 지원할수록 나의 원서 접수가 빨라지고, 뒤따른 모든 절차들이 빨라져서 한정된 입학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될 확률이 커지는 거다.
지원이 길고 복잡한데다가 확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빨리 빨리 지원해야해서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
그리고 미쳐가는 경쟁률과 합격률 때문에 입시생들은 평균적으로 25~30곳에 지원한다.
(재밌는 여담 몇 가지를 추가하자면,
#1
나는 20곳에 지원했는데 같이 수업 들었던 친구 중 50곳에 지원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2
1차 지원서는 귀찮음이 상당하다. 내가 여태껏 들었던 수업 이름, 학정번호, 성적, 학점 수를 하나하나 직접 다 적어내야한다. 나는 한국 대학, 교환학생 미국 대학, 생물학과를 공부한 미국 대학의 세 군데를 다 적어내느라 정말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제출 후 오타를 발견해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3
하지만 2차 지원서에 비하면 1차는 약과였다. 연락 오는 몇 십개의 학교마다 평균 5개 정도의 질문에 답하는 자소서를 써야하는데 매 학교마다 묻는 질문의 내용도 요구하는 답변의 방식도 다 다르다.. 내 7월은 정말 손가락이 닳는 줄 알았다.
아, 물론 여러 의대에 지원을 안 하면 손가락은 살릴 수 있겠지만 각 미국 의대마다 매년 9,000~16,000명 정도가 지원하고 매년 지원자 수가 늘고 있다. 이 숫자를 본 수능이라는 극악한 경쟁 입시제도에 익숙한 눈물나는 우리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별 거 아니네.'라고 하겠지만 그 주 출신 사람들에게 극명한 우선권을 주는 주 정부 소속 의대를 제외하고는 매우 낮은 합격률은 자랑한다. 물론 좋은 의대일수록 합격률은 더 낮아진다.
내가 일순위로 바랐던 의대 공식 웹사이트에 나온 바로 위 학년 즉, 2023년 입학생 데이터를 한 번 보자.
총 12,881명이 지원했고 그 중 141명이 합격했다. 쉽게 합격률(%)을 계산하기 위해 141 나누기 12,881 곱하기 100을 하면 1.09%가 나온다.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숫자인가.
"Curiosity killed the cat."이라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 불필요한 행위의 위험성을 주의시키는 속담이 있다. 내 이야기였다. 지원서를 넣어놓고 궁금증에 이 숫자를 계산한 그 날 나는 머릿속으로 '와, 뭐 됐다.'를 되니이고 밖으로는 계속 허허 웃기만 했었다. 그 날의 멘탈 붕괴는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이렇게 무사시한 미국 의대 지원 시기가 시작하기 전 1월이 되자마자 나는 추천서를 요청하러 다녔다.
나를 꽤 오래 봐오신 한 미국인 교수님께서 흔쾌히 써주겠다고 하시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A person like you should be a doctor,
a kind and hard working person.
사실 연구실에서 온갖 수모를 참으며 끝내 연구로 작은 수상을 했을 때보다도
교수님의 이 한 문장이 나를 말도 안 되게 위로했다.
탁상 거울로 울음을 멈추려 노력하며 끝까지 손으로는 깜지를 써내리던 많은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오른 손날을 푸르게 물들었던 잉크가 마치 훈장처럼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나의 노력과 진가를 알아봐 주신 교수님들과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총 10개의 추천서를 제출했다.
대부분의 미국 의대의 경우 최소 혹은 딱 3개만 요구하는데
나의 경우, 학교에 committee letter를 해주었기에 총 10개의 추천서였지만 1개로 묶어 낼 수 있었다.
(Committee letter라고 해서 내 모든 추천서를 학교에서 묶어서 공증해 준 후 입시처에 접수해 주는 제도이다.)
물론 최다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열 개의 추천서들은 내게 만큼은 증거였다.
방황은 했지만 매 순간 진심이었고 열심이었다는 증거.
내가 그 치열하고 바쁘게 살던 와중에도 사람으로서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녔다는 증거.
비록 미치도록 바쁘고 혼미한 지원 기간이었음에도 나의 2023년은 꽤 자신에게 뿌듯한 해였다.
무엇보다 그 뿌듯함의 절정은 아무래도 2023년 11월 22일 새벽 5시가 아닐까 싶다.
내가 최고로 바라던 의대에 합격했다는 걸 깨달은 바로 그 시간.
인터뷰를 다 보고 나서 나에게 입학처 직원이 수고했고 본교의 경우 11월 20일에 아날로그 식으로 결과를 우편으로 집에 보내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편 봉투를 보여줬다,
샛노란 봉투 위 자리 잡은 여러 색깔의 콘페티 이미지.
하지만, 우편의 경우 최소 이틀에서 일주일이 걸려 집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 점을 감안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바로 우체국 사이트에 들어가 미리 그날 올 우편들을 이메일로 전달받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20일부터 나의 집착은 시작됐다.
무슨 메일이든 내 핸드폰이 울리면 혹시 그 서비스 알람 메일인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잠도 잘 안 오고 새벽에도 핸드폰을 확인하니 계속 악순환이 되어 잠도 잘 못 자고 뒤척였다.
20일이 지나고, 21일이 지나고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우편함을 확인하고 메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확인했다.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00시, 나는 결국 남편이 곤히 자고 있는 침대를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해봤지만 그냥 눈만 감고 누워있었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아, 그 질문 답변 이렇게 할걸.' '혹시 주소 잘못 썼나.' '면접 복장이 이상했나.' '떨어진 거면 어떡하지.'
05시,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 이틀간 그랬는데 아니겠지, 다른 메일이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메일을 열었다.
흑백 스캔이지만 똑똑히 보이는 "ㅁㅁㅁ 의과대학"
그리고 내 머릿속에 형형색색으로 보이는 콘페티 이미지.
벌떡 일어나 안경을 찾았다.
여전히 똑똑히 보이는...
남편을 깨울까 봐 소리도 못 내고 새벽에 홀로 광란의 춤을 추고 드디어 나는 곤히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남편이 1층에 내려와 거실 소파에 곯아떨어진 나를 흔들어 깨웠다.
왜 여기서 자냐고, 자기 코 골았냐는 질문에 나는 남편의 고막을 찢었다.
나 ㅁㅁㅁ 의대 붙은 것 같아!!!
이른 오후, 우체국 트럭 소리를 듣고 나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재빠르게 우체통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떨리는 마음보다 더 떨리는 손을 우체통 안으로 뻗었다.
드디어 갖게 되었다,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던 노란 봉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