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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Aug 30. 2019

10년 전 꿈속의 그대를 찾아서

내가 음식 칼럼니스트가 된 이유

의욕을 잃었을 때가 가장 새로 시작하기 좋은 때

필자는 살면서 한 번도 종교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훈련소 때 너무 힘들어서 잠깐 교회를 다녀본 게 전부인데

사람이 정말 급박한 상황이 다가오면 신을 찾게 되더라.


교통사고가 난 지 5일이 지났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살았다는 것에 신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문제는 의욕이다.

안 그래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약 때문에 하루종이 잠만 자는데, 

사고 때문에 하루 이틀 글에서 손을 놓게 되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점점 사라지게 되더라,

생각해둔 소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사고 전에 쓰던 글마저 붙잡기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사라졌다.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지금 이 타이밍이 아마 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오늘의 글을 시작해본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서 음식을 좋아하게 되기까지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어린 시절 필자에게

'넌 커서 음식에 관련된 일을 한단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이 미친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걸까'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수집했던 자동차 카탈로그

어릴 때는 먹는 것은 좋아했지만

정말로 관심 있던 부분은 자동차였다.

늘 자동차 잡지를 달고 살았고

언제나 자동차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으며

요즘 말로 하자면 '자동차 마니아'였다.


공부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동차, 그냥 자동차에만 미쳐서 살았다.

만약 자동차 관련 고등학교를 진학했다면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바뀌었겠지만

자동차는 좋아도 흥미 없는 수학은 공부하기 싫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참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음식 관련 종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아무 목표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에 대한 고민이 어마어마했다.

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가? 

아직 인생에 구체적인 목표도 없었고, 그냥 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을 때

어머니의 조언이 인생을 360도 돌리고 180도 한번 더 돌려놓았다.


나는 몰랐는데 어머니는 아시던 길

지금까지 필자가 정말로 진심을 담아 열심히 관심 있게 파고들었던 것이 있었다.

자동차에 가려져서 정작 나 자신은 잘 느끼지 못했던 것.

.내 10대시절을 함께 했던 고마운 분들

허영만 작가의 '식객', 카리야 테츠의 '맛의 달인' 키쿠치 쇼타의 '오센'


요리만화는 늘 달고 살았고 요리는 취미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취미였던 요리는 점점 일상생활에서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고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에 펜이 아닌 팬을 잡고 있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런 필자의 모습을 늘 유심히 보고 계시던 어머니는

자신이 졸업하신 대학을 소개해주셨다.


마치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필자는 '관광외식경영'이라는

평생 필자가 살아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뭐, 어머니도 식품을 전공하셨으니 모전자전 아닐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나중에 가게를 차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음식 칼럼니스트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필자에게 인생에 아주 큰 시발점이 되는 '미친 짓'이 있었다.


꿈속의 그대를 만나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누구나 어릴 때 TV에서 본 음식 중에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잊지 못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텔레토비에 나오는 분홍 죽

누구는 윌리스 그로밋에 나오는 치즈 크래커

누구는 원피스의 만화 고기를 말하지만

필자는 학창 시절 봤던 다큐가 늘 기억에 남는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 어떤 여행을 해야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필자의 머릿속에 바로 그 다큐멘터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봐도 참 맛깔나는 다큐멘터리 '라멘탐험대'

'라멘탐험대'

한국에서는 'THE 라멘'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다큐멘터리는

음식칼럼니스트 '한쯔엔도'와 음식전문PD '바바 아키라'가 전국을돌며 삼시세끼 라멘만 먹는

그야말로 라멘의 라멘에 의한 라멘을 위한 다큐멘터리였다.

꽤나 오래전 다큐멘터리인 데다 일본 방송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찾는 건 정말로 어려웠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번역기를 돌려가며

인터넷을 찾고 또 찾아서 드디어 다큐멘터리의 이름과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오카야마현 가사오카시에 위치한 작은 중화 소바집 '미야마'


시골 중에서도 가장 촌동네인 츄코쿠에 위치했던 이 가게 하나 때문에

츄코쿠행을 결정했던 이 여행은 

남들이 보면 "고작 라멘 한 그릇 때문에 거기까지 가?"라는 말이 나오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일본인이 마라도 짜장면이 맛있다는 말을 듣고 마라도까지 가는 정도

가사오카역에서 내렸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히로시마에서 전철을 타고 도착한 가사오카.

벌써 해가 진 시간인 데다가 시골 동네인 탓에

대중교통도 잘 되어있지 않아서

가사오카역에서 꽤나 떨어져 있는 라멘 가게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친구가 버스기사이게 정말 짧은 일본어로

"미야마가 어디 있냐"라고 물어봤었고

이 질문은 이해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아! 미야마상!"이라는 대답과 함께

빨리 버스에 타라는 기사님의 손짓을 보고 버스에 올라탔다.

10년을 걸친 여정(?)의 끝을 향해

버스 종점에서 내린 뒤 버스기사 기사의 아주 짧은 길안내를 따라 끝없는 해안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남들은 상상 속에서만 끝냈을지도 모르는 일을

직접 실현시키기 위해 시작된 여정.


10년 된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10년전 다큐멘터리 속 똑같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라멘집 '미야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가게는 TV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철없던 어린 시절 "크면 꼭 저길 가봐야지"라는 스쳐 지나갈뻔한 생각을

여전히 철없던 녀석이 이루어내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감정은 아직도 설명할 수 없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온다던데, 막상 눈물은 안 나오더라.

웃음. 끝없이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울어야 하나? 

행복하면 당연히 웃음이 나온다. 이날은 정말 실컷 웃었다.

가게의 내부는 마치 초콜릿맛이 날것같이 생겼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 낯선 외지인들이 가게를 찾아오니 사장님의 표정은 놀람반 의아함반이였다.

다큐멘터리에서 칼럼니스트 한쯔엔도 씨가 앉은자리에 앉아서 그가 시켰던 메뉴인 중화 소바를 시킨다.

미야마의 메인 메뉴 중화 소바

간장 베이스의 국물에 간단한 고명 몇 가지. 미야마의 중화 소바는 다른 가게들과 달리

정말 단순함 그 자체를 보여준다. 하지만 국물을 한번 맛본다면, 머릿속 소우주가 펼쳐진다.

일식 경력 35년의 사장님이 세토내해의 여러 종류의 생선을 이용해 만든 간장 육수는

"이 육수 하나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는 사장님의 자존심을 멋지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중화 소바에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심플 이즈 베스트"

이것의 필자가 하고 싶은 한마디이다.


필자는 미야마를 통해 필자는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속 한쯔엔도 칼럼니스트는 그저 라멘만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일본의 라멘을 연구하고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사람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것이 아닌, 음식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즐거움을 알게 된 후에

필자에겐 하나의 목표가 생기게 되었다.


그저 맛을 평가하는 '미식가'가 아닌

이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음식 칼럼니스트가 되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다

찾아내는 재미를 독자 여러분께도 선사하고 싶다.


이것이 필자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바로 달려가라.

나중에 한 번쯤 다시 이 가게를 들려 제대로 된 취재를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미야마의 중화 소바는 이제 정말 꿈속의 음식이 되어버렸다.

미야마의 폐업을 알리는 안내문

2019년 3월 31일.

미야마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가 다녀간 2015년 겨울 이후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사장님은

2016년에 타계하셨다.

이후 가게를 함께 만든 사모님과 따님분이 가게를 계속 이끌어갔지만, 

미야마의 기나긴 역사는 결국 끝났다.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필자가 처음 찾아갔을 당시에도

사장님의 건강은 이미 좋지 않은 편이셨고

많은 손님들은 미야마의 맛이 사라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생각보다 잔혹하다.


라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추천하던 가게가 사라졌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맛을 경험해봤다면 좋았을 텐데, 이젠 책과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만약 필자가 2015년 겨울에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어린 시절의 꿈과 새로운 꿈을 둘 다 놓쳤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독자들도 꼭 가고 싶은 음식점이 있다면,

그것이 회사일이나 학업보다 중요한 존재라 생각된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떠나라.


꿈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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