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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프로듀서 Aug 22. 2019

타국의 땅에서 한식이 피어나다

음식도 재외동포가 있다

출생지는 일본 국적은 한국

누구의 이야기일까?


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이라는 국적을 달고 활약하는 자랑스러운 재외동포들.

그런데, 음식에도 재외동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번 이야기는 머나먼 타국의 땅에서 한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추성훈 선수의 매서운 공격처럼, 타국 땅에서 미식가들의 입속에 펀치를 날리는

재외동포, 아니 재외 음식들을 만나보자.


그리움에서 만들어진 실향의 음식

모리오카 냉면

한민족은 정말 국수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그중에서도 냉면을 전 세계에서 가장 최고로 좋아하는 민족이다.


지역마다 지역특색과 전후 사정이 겹치며 다양한 냉면이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졌지만

필자는 최고의 냉면은 평양이 아닌 함흥이라고 생각한다.


감자의 주생산지로 쫄깃하고 질긴 함흥냉면의 고향인 함흥의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이곳저곳 흩어졌지만

그들의 냉면에 대한 사랑은 질긴 냉면 면발처럼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가자미가 잘 잡히지 않는 속초에서는 명태를 이용한 꾸미를 올린 함흥냉면을

전쟁통의 부산에서는 미군의 밀가루를 이용한 밀면을 만들어낸 함흥 사람들의 냉면 사랑은


바다 건너 타국에서까지 잊을 수 없었다보다.

함흥 출신의 재일동포 양용철 씨(우측)

함흥 출신의 재일동포였던 양용철 씨는

고향의 냉면 맛을 잊지 못해서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만들어낸 모리오카 냉면.


초창기에는 함흥 출신답게 매운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지만,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조금씩 개량된 결과

모리오카 냉면은 모리오카시의 명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속초, 부산 그리고 모리오카까지 함흥 사람들의 냉면 사랑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그런데, 일본에는 또 하나의 한국식 냉면이 있다.

오늘의 주제이자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 바로 벳푸 냉면이다.


만주라는 별에서 온 그대 벳푸 냉면

벳푸의 명소중 하나 벳푸 시장

규슈의 대표 관광지, 아니 일본의 대표 관광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벳푸,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필자는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면, 벳푸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럴 때마다 "냉면 먹어봤어요?"라는 말을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다 이렇다.


"한국에서도 먹는데 왜 일본까지 가서 먹어요?"


그 맛있는 걸 놓치다니!

토리텐(좌측)과 사바 스시(우측)

벳푸라는 곳이 워낙 온천이 유명한 곳이다 보니, 온천에 집중한 나머지

수많은 미식을 놓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가라아게와는 다른 맛과 조리법을 가진 "토리텐"에서부터

세토내해의 황금어장을 가진 벳푸의 신선한 고등어 초밥인 "사바 스시"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벳푸 냉면"까지. 벳푸는 굉장한 미식을 숨긴 다이아 원석 같은 도시다.


벳푸 냉면집 "이찌방"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데 왜 일본에서도 먹느냐 라는 질문은

사실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첫째, 한국음식이지만 한국에서는 먹을 수 없으며

둘째, 벳푸 냉면은 벳푸가 아니면 먹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일본에서 냉면은 야키니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지만,

대부분 모리오카 냉면 스타일로 만들기 때문에 냉면보다는 밀면에 가깝다.

그렇다면. 도대체 벳푸 냉면의 모습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리고 벳푸 냉면은 대체 누가 왜 시작한 것일까?

만주국을 홍보하는 일본군의 포스터

속을 뻥 뚫어주는 시원한 냉면과는 다르게, 얽힌 이야기들은 고구마 10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


함흥에서 이주해온 실향민이 만든 모리오카 냉면과 정 반대로

벳푸 냉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국(지금의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살던 일본인이

만주국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배워온 뒤, 2차 대전이 끝난 후 벳푸로 돌아와서 시작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누가 알려준 것인지,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녀석은 대체 무엇일까?


김성모의 만화처럼, 전국구 쎈놈들이 한 그릇에 모이다

벳푸냉면은 메밀면이 특징이다.

벳푸 냉면은 그동안 전국의 국수를 먹으러

여행을 다닌 필자에겐 재미있는 십자말풀이였다.

한국에선 흔하지만 일본에선 보기 힘든 국수 뽑는 기계

메밀을 사용하고 굵은 분창을 사용한 면은

마치 강원도의 막국수를 보는듯하고

육수는 평양냉면의 고소함과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소고기 육수다.

거기에 배추로 만든 김치까지.


펼쳐서 보면 대동여지도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합쳐놓으니 난생처음 보는 요리가 나온다.



어린 시절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조립한 블록 장난감처럼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냉면"이라는 모습과는 많이 동떨어져있다.


일본에서 흔한 돼지고기 챠슈 대신 소고기 고명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 재미있는 불협화음은, 굉장한 시청률을 보여주는 막장드라마처럼

먹는 동안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오크통에서 오랫동안 잠을 자고 깨어난 숲 속의 공주 같은 위스키처럼 아름다운 색을 가진 육수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그렇다고 면이 육수의 강함에 묻히느냐? 절대 아니다.

씹을수록 입과 콧속에서 퍼지는 향기로운 메밀향은

필자의 머릿속을 봉평의 메밀밭으로 바꿔버린다.

거기에 새콤하고 아삭한 김치는 강력한 원투펀치를 맞고 쓰러지고 있는 필자에게

파운딩을 걸고 마무리 펀치를 날려댄다.


이런 맛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국물도 남길 수 없다

경기는 끝났다.


바다 건너 타국에서 만난 벳푸 냉면은

필자에게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가게를 나온 필자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어찌 보면 만주국이라는 먼 타향에서 살던 조선인들이

모리오카 냉면처럼 기억의 조각을 모아 만든 음식이 아니라.


서로 자신의 고향의 국수를 자랑하다가 만들어진

마녀의 솥에서 나온 마법의 국수가 아녔을까?



라멘 테이 이찌방

8-31 Chūōmachi, Beppu, Oita 874-0936 일본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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