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LPG자동차①-번데기로 보는 한국 LPG자동차의 과거
'세계 최초'
하도 많이 쓰이다 보니 이제는 지겹다는 말도 나오지만, 여전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리 긍정적인 수식어는 아니다.
단적인 예로, 중국기업 로욜의 '플렉스파이'는 세계 최초 폴더블 스마트폰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수많은 단점과 결함을 가진 급조된 실패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에 비해 삼성의 '갤럭시 폴드'는 어떠한가.
비록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는 달지 못했지만,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로서 당당히 세계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 최초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LPG자동차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가장 발달한 LPG자동차 기술력은 한국이 가지고 있다.
약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LPG자동차 규제 속에서 어떻게 한국은 세계 최고의 LPG자동차 기술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0년의 LPG규제가 전면 완화된 지 어언 1년이 되어가는 지금,
과거를 뒤돌아보며 앞으로의 한국 LPG자동차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보도록 하자.
1950년대, 주한미군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모습을 드러낸 LPG는 높은 가격 때문에 일부 부유층 가정에서만 사용되던 비싼 연료였다.
하지만 비싼 가격에도 LPG는 연탄보다 편리하다는 점에서 점점 수요가 늘어나게 되고
1960년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LPG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LPG시대가 열리게 된다.
1966년 대한석유공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LPG홍보가 시작된다.
때마침 정부는 당시 대부분 디젤엔진으로 운행되던 시내버스를 모두 휘발유로 교체하는 '도시 공기오염 감소 계획'을 세우면서, 휘발유와 연료 성분이 동일한 LPG가 드디어 차량용으로 빛을 보기 시작한다.
디젤보다 매연도 적게 배출하고, 휘발유보다 가격도 싸니, LPG는 버스업체에게 그야말로 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LPG는 정말로 '남아도는 부산물'이었다.
울산정유공장의 경우, 부산물로 나오는 LPG 1200톤 중에서 소비되는 양은 고작 절반인 600톤뿐이었기 때문에
LPG버스의 증가는 그야말로 쌍수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공급자와 수요자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LPG버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LPG의 이런 밝은 미래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번데기는 해외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혐오식품으로 불리지만,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번데기를 먹어온 한국인들에게 번데기는 '벌레 요리'라기보다 '간식'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한국이 번데기를 식용한 역사는 굉장히 짧지만, 험난하고 배고팠던 한국의 경제발전시기를 함께해온 번데기는 당당히 한식문화로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시장에 가면 번데기를 파는 노점을 볼 수 있지만, 국산 번데기를 사용하는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2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국내 양잠산업이 몰락하게 되면서,
양잠산업의 부산물로 남아돌던 국내산 번데기가 아예 자취를 감추어버렸기 때문이다.
비단을 목적으로 하는 양잠산업은 중국에게 밀려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남은 양잠산업은 동충하초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부산물인 번데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번데기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번데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데 수요는 꾸준히 존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전량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1969년 한국의 LPG수요는 국내 정유산업의 부산물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해외에서 1000톤을 수입했지만 그마저도 부족하여 일본에서 긴급하게 420톤을 추가로 수입할 지경이었으니
지금의 번데기와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외화유출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정부는 드디어 LPG를 향한 칼을 빼어 드는데,
바야흐로 길고 긴 40년의 한국 LPG규제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70년, LPG 가격을 125%나 올리고 LPG개조를 금지하는 정부의 규제인 '가스 사용 억제책'이 시행된다.
LPG는 가격이 최대 장점인데, 그 메리트가 사라졌으니 버스업체는 더 이상 LPG버스를 운행할 이유가 없었고
LPG버스는 다시 휘발유로 돌아가게 되며, LPG버스로 시작된 1차 LPG열풍은 사그라들게 되었다.
그런데, LPG버스의 인기가 사그라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1년에 LPG는 다시 주목을 받는데,
휘발유와 경유의 가격이 20% 상승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LPG가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휘발유보다 훨씬 저렴한 LPG는 연료비 절감이 곧 수익창출이던 택시사업자들에게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고, 결국 택시사업자들은 LPG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불법 LPG개조 택시를 지속적으로 단속했지만
불법개조업자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LPG개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법 LPG개조를 막으려는 정부와 불법 LPG개조를 원하는 택시사업자들의 전쟁으로
본의 아니게 LPG의 두 번째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번데기 역시 단속과의 전쟁을 치렀던 시기가 있었다.
1978년, 번데기를 먹고 10명의 어린이가 숨진 '번데기 집단 식중독 사건'이 터진다.
원인은 번데기가 담겨있던 포대였다.
당시 번데기는 식품이 아닌 농산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일반 농산물처럼 포대에 담아서 유통했었다.
문제는 이때 사용한 포대가 맹독성 농약을 담았었던 포대였고, 잔류성 농약이 그대로 번데기에 묻어나면서 집단 식중독이라는 초대형사고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형참사 이후에도 워낙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다 보니,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번데기는 다시 길거리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불법 LPG개조가 운수업자들의 고마운 존재였던 것처럼, 번데기도 어찌 보면 서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에, 비록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정부는 불법 LPG개조를 더 이상 그냥 쳐다만 볼 수는 없었다.
휘발유 소비의 감소를 우려하는 정유사는 LPG규제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수많은 택시들이 LPG를 이용하여 달리고 있었고,
한국도 저렴하고 매연이 적은 LPG의 우수성을 직접 체감하며, 점점 더 많은 LPG 택시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규제를 하자니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는 LPG 택시를 막을 수가 없었고,
규제를 완화하려니 정유사의 반발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정부는 결국 궁여지책으로 '일괄 허용'이라는 명목으로 택시의 LPG 사용을 허가한다.
비록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드디어 택시업계는 본격적으로 LPG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71년 신진자동차의 코로나가 도요타자동차와의 5년 기술제휴 계약이 끝나게 되면서 72년을 끝으로 단종되자,
마쯔다 자동차의 '패밀리아'차체에 기아가 개량한 엔진을 올린 기아산업의 '브리사'의 독주가 시작된다.
1974년부터 판매가 시작된 브리사는 1975년 승용차 시장 판매량의 과반수를 넘길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누렸는데, 특히 자가용보다 저렴한 영업용 트림은 택시업계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대히트를 치게 된다.
1976년 전국 2만 9000대의 택시 중 1만 2349대가 기아산업의 브리사였으니, 그 인기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브리사 역시 휘발유 모델밖에 없었기 때문에, 택시업계는 여전히 LPG개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택시의 LPG 연료 사용 확대를 검토하던 정부의 요구사항과 맞물리면서
1977년 기아산업은 LPG엔진을 장착한 브리사를 시장에 출시하게 된다.
'브리사 LPG'가 일으킨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완성차 회사가 LPG시장에 뛰어들며 일으킨 거대한 파도의 첫 번째 물결이었다.
LPG개조로 시작된 '한국 LPG자동차'라는 작은 번데기가, 이제 번데기를 찢고 나와
한 마리의 나비처럼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며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기아산업은 더 이상 승용차를 제작하지 못하게 되면서,
브리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가 서로 LPG 택시를 출시하며 LPG시장의 판을 키워가기 시작하는데,
80년대 초반 LPG자동차 시장에 거대한 변화가 찾아오면서, LPG자동차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당시 소형차 위주였던 택시의 중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먼저 출사표를 던진 것은 현대자동차였다.
과거 포드와의 기술제휴로 만든 코티나로 중형차 시장에 진출한 현대자동차는, 더 이상 포드의 요구사항에 끌려다닐 수 없다는 정주영 회장의 지시로 중형차 독자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고, 1983년 '스텔라'를 출시하게 된다.
하지만 스텔라는 완벽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수십 가지의 품질불량과 차량화재까지 일어나면서 출시 당시 반짝했던 인기는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후 대규모 리콜과 여러 차례 품질개선을 통해 1985년 다시 국내 중형택시 시장의 강자로 올라서지만
대우와 기아가 현대자동차의 독주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새한자동차를 인수한 대우자동차는 대우의 고급 라인업인 로얄시리즈의 중형모델 '로얄 듀크'로 참전하게 된다.
대우의 로얄시리즈는 새한자동차 시절부터 고급차의 상징이었고, 중형모델이었던 '로얄 듀크'역시 스텔라보다 고급스러운 모습을 어필하며 중형택시 시장에서 스텔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면서, 오랫동안 승용차 시장 복귀를 위해 칼을 갈아온 기아자동차도
'콩코드 LPG'로 중형택시 시장에 참전하면서, 중형 LPG 택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정부가 만든 '1600CC~2000CC 중형택시'라는 옥타곤 케이지 속에서의 1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이는 LPG완성차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데,
바야흐로 90년대 '대 LPG시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2부에서 계속-
글쓴이-쉐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