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의 배심원 1 > 에서 이어집니다
화면에 '김순례'라는 예금주 명의로 5억 원이 입금된 통장이 보였다. 송금인은 이치수다.
“아, 현금으로 주었어야 했는데…”
치수는 후회했지만, 당시 블랙박스의 진위를 알 수 없었기에 이체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예금주는 엄두식의 모친입니다. 그러면 엄두식이 누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서 엊그제 뺑소니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바로 엄두식입니다. 여기서 입금인은 차 선생을 매수하려 했던 이치수 씨입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사람이 왜 김순례 씨에게 5억 원을 입금했을까요? 혹시 어떤 약점이 잡혔던 걸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감을 잡으셨겠죠. 바로 이겁니다.”
모니터에 메모리 카드가 떴다.
“이 메모리 카드에는 분명 엄두식의 지문이 있을 것입니다. 피고인 측에서 그토록 찾고 있던 블랙박스가 그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죠. 이것으로 도원그룹을 협박하여 거액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신용 불량이라 모친의 통장으로 돈을 받은 것이고요. 이에 지문 감식을 재판부에 요청합니다.”
한 기자가 질문했다.
“그렇다고 해도 엄두식의 협박과 교통사고 사망 간의 인과관계를 단정짓기는 무리가 아닐까요?”
“이 녹음을 들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엄두식 마을 주민들의 대화입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식이 녀석, 땡전 한 푼 없던 망나니가 요즘 사방팔방에 돈을 뿌리고 다닌다며? 자기 말로는 로또에 당첨됐다고 하는데 신용 불량인 놈이 그걸 살 돈이나 있었나? 며칠 전에는 술집에서 팁으로 100만 원을 줬다더라. 요새 경마장에, 노름방에 정신이 없대.”
“엄두식은 이렇게 돈을 모두 탕진하고 메모리 카드로 다시 도원그룹을 겁박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고를 당하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이 시나리오는 연우의 창작이었다. 아침 뉴스에서 두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가 신용 불량자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면 본인의 통장을 사용할 수 없다. 돈이 묶여서 인출이 불가능하다. 대안은 오직 하나, 모친의 통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아에게 신풍리로 가서 메모리 카드의 행방을 찾고, 모친의 통장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겼다.
“어머니, 두식 씨의 통장이 어디에 있나요? 제가 얼마라도 넣어드릴 테니 용돈으로 쓰세요.”
“아이고, 말이라도 고마워. 근데 그놈은 신용 불량이라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어서 통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했지. 장롱 안에 있을 거야. 어디서 큰 돈이 들어왔는데 사업을 한다더니 결국 더 망가졌어. 이 어미한테는 외상값 갚을 돈만 주고 말이야.”
상아는 휴대폰으로 통장의 사진을 찍어 연우에게 보냈다.
연우는 이러한 상황을 기승전결로 정리하여 재판 중 지상에게 전달했다.
“그럼, 도원그룹이 살해했다는 건가요?”
다른 기자가 물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엄두식만이 아니죠.”
갑자기 지상은 양복 단추를 풀고 와이셔츠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옆구리에 피 젖은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이 상처가 궁금하지 않나요? 어젯밤 괴한들에게 납치, 감금되고서 탈출하다가 칼에 찔렸던 거죠.”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요? 그럼 이런 몸꼴로 법정에 등장하는 변호인을 본 적이 있나요?”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는 공포의 시간을 떠올리며 소름이 돋았다.
아침, 지방의 허름한 창고에서 지상은 마취에서 깨어났다. 손발이 노끈으로 묶인 그는 어깨들에게 둘러싸인 채 있었다.
“어이, 변호사 양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어. 그러면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게.”
“섣불리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알았어. 근데 나 용변이 마려운데, 이거 좀 풀어줘.”
“그냥 거기다 싸.”
"오줌이 아니고 똥이라서 장난이 아닐 텐데."
“야, 나 똥 냄새 무지 싫어해.”
“나도 그래.”
“발만 풀어주고 감시하면 되잖아.”
“에이 씨, 알았다고!”
어깨1이 짜증을 내며 발의 노끈을 풀어주자, 지상이 그의 가슴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어깨1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그 사이 지상은 재빠르게 손의 노끈을 풀었다.
당황한 어깨들이 성난 황소처럼 주먹을 휘두르자, 그는 춤을 추듯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며 피했다. 1대 3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어깨2가 발길질을 날리자, 지상은 몸을 숙여 팔꿈치로 그의 턱을 올려 쳤다. 어깨2는 벌렁쓰러져 입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흘러나왔다.
그때 어깨3이 휘두른 각목에 그의 이마가 찢어지고 시퍼런 멍이 들었다. 지상은 볼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슬쩍 핥았다. 그의 눈빛과 표정은 두려움이나 적의가 아니었다. 붉은 핏자국이 번진 입가에 새하얀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뒤에서 어깨4가 붕 뜨더니 그의 등을 내리쳤다. 지상은 다리가 삐끗하며 넘어졌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의 배를 향해 어깨3이 회칼로 쑤셨다.
지상은 급소를 피하려다 옆구리를 찔렸다. 샘솟는 피를 손으로 막은 그는 싸우며 점점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날렵하게 밖으로 뛰쳐나가 문고리를 걸었다. 안에서는 어깨들이 아우성쳤다. 지상은 외진 길을 한참 달려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저는 검사인데 서울중앙지법으로 빨리 가주세요.”
“아니 검사님께서 어쩌다 만신창이가 되셨어요?”
“살인 사건이니까 비상등 켜고 달려주세요. 책임은 제가 질게요.”
“네, 알겠습니다.”
“큰일이네. 재판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러분, 엊그제 엄두식이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차 선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고, 변호인은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우연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진범인 백도진에게 불리한 사람들을 특정 집단이 테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원그룹과 태양로펌이 살인, 상해, 납치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한 기자가 질문했다.
“이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금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사는 부실 수사로 일관한 고석낙 검사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만약 강행된다면 변호인은 고등 검찰청에 항고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석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상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한 손을 못 쓰는 복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지.”
기자들은 수사권 박탈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느라 분주했다.
“변호인, 더 밝힐 내용이 있다면 모두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재판부를 탓하지 마시고요.”
심 판사는 학을 뗀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판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또 다른 핵폭탄 발언을 기대하던 방청객들이 오히려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