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지상은 안테나가 달린 작은 장비로 사무실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뭘 하고 계세요?”
“쉿.”
지상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게 뭐예요?”
“이거? 도청 탐지기.”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 곳이 태양이야. 감쪽같이 첩자를 심을 정도면 모르겠어?”
“그렇군요.”
“다행히 도청기는 없네.”
“문 변이 그 역할을 대신하잖아요.”
“맞아, 도청기는 발각될 위험이 있으니까. 태양이 세호에게 도청기를 설치하라고 했다면 불법 도청 교사로 처벌받을 수 있어.”
“도청 장치만 없으면 세호 선에서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는 거네요.”
“와우! 이제 연우 법조인 다 됐네. 로스쿨 갈 생각은 없어?”
“글쎄요. 글구 선배님께 모두 배운거죠. 식당에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하잖아요.”
지상이 가방에서 휴대폰 네 개를 꺼냈다.
“앞으로 이 폰을 사용해.”
“무슨 폰이에요?”
“대포폰.”
“태양이 우리 휴대폰을 도청할까 그런 거죠?”
“역시 연우는 센스쟁이야.”
“근데 이 오작교 폰은 어디서 구했어요?”
“오작교 폰? 하하하. 그럼 너와 나는 견우고 상아와 하 변은 직녀라는 거네.”
“그렇죠.”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고객을 만나게 돼. 이 폰은 알고 있던 폰 판매업자에게서 받은 거야. 전에 이 의뢰인의 소송에서 이겨서 부탁했더니 두어 달 쓰라고 주더군.”
“혹시 이 폰들 불법은 아니겠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듯이 지금이 그런 상황이야. 이제 우리 네 명은 통화할 때 이 폰을 이용하자.”
“네, 상아에게도 전할게요.”
“그리고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는 세호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 밖에서 만나고.”
그 후로 그들은 카페에서 자주 모이게 되었다.
"현우야, 우리 그림 한 번 그려볼까?"
"무슨 그림인데요?"
“세호를 활용하는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요?”
“스릴이 있잖아.”
“구체적인 계획은요?”
“CCTV를 복원 업체에 맡겼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태양은 그곳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겠지? 한마디로 헛고생을 시켜서 힘을 빼게 하려는 거야.”
“태양의 작업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데미지를 입히자는 거군요.”
“맞아. 멋진 전략이지만 너와 나의 찰떡 호흡이 필수야. 잘못하면 우리가 되치기를 당할 수 있어.”
“이 속임수가 과연 통할까요?”
“사람에게 많이 속은 사람일수록 사람을 믿지 않을 것 같지? 아니야. 사람을 많이 속인 사람이 사람을 더 안 믿어."
기탁은 요원들을 소집했다.
“여러분은 경찰, 검찰, 국정원 출신으로 정보 분야에서 손꼽히는 베테랑입니다.”
이어 그는 배심원 후보자 명부와 질문지를 흔들며 말했다.
“이들은 국민참여재판에 참석 통지서를 보낸 45명의 배심원 후보자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뒷조사하여 성향을 파악해야 합니다. 재판까지는 이제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TF를 조직했으며, 성공하면 보너스와 3배의 연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히 보안은 생명이니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백 공자 구하기’ 작전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설이 끝나자, 요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며칠 전, 법원 형사과장 마동팔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슨 일이세요?... 원래는 안 되지만 오 변호사님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네요. 퇴근 후에 거기서 보자고요?”
그는 곧바로 빈자리인 담당자 책상으로 가서 ‘후보자 명부’와 ‘질문지’를 빼내 복사했다.
“오 변은 공무원이 박봉인 줄 알고 적절한 시기에 비상금을 준다고 하네.”
동팔은 좋아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원은 재판 기일 한 달 전에 140여 명의 배심원 후보자들에게 참여 통지서를 발송했다. 그중 참석 의사를 밝힌 45명의 명부와 질문지가 열흘 전에 법원에 도착했다.
질문지의 내용은 후보자의 직업, 최종 학력, 전과 유무 등으로, 배심원 선정 2일 전에 검사와 변호인에게 전달된다. 이 서류는 담당자 외에는 알 수 없지만, 기탁은 이렇게 미리 입수했다.
전화를 받은 지상은 유난히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CCTV 영상을 복구할 업체를 찾았다고? 그래서 이미 맡겼다고? 연우야, 수고했어. 이제 모든 게 끝났어!”
그는 세호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복원 업체를 찾았나 봐요. 어디래요?”
“용산 전자상가나 세운 전자상가라고 하더군. 복구만 하면 되지 장소가 뭐가 중요해. 안 그래?”
“그렇긴 하죠. 저, 화장실 좀….”
세호는 속이 안 좋은 척하며 배를 매만지며 나갔다.
기탁의 휴대폰이 울렸다.
“... 알겠어요. 계속 상황을 살피면서 보고해요.”
전화를 끊은 기탁은 역정을 냈다.
“조 변, 당신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네? 뭐라고요?”
“통화를 다 듣고도 왜 딴청이야!”
수찬은 속초 사무소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상이 삭제됐다고 했는데도… 그리고 매스컴에 제보하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죠.”
수찬은 기가 죽었다. 그 순간 기탁은 또 다른 계략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CCTV 영상 복구라….”
그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번졌다.
기탁은 요원들을 소집해 지시를 내렸다.
“배심원 신상 파악 작업은 잠시 보류합니다. 이제부터는 CCTV 복원 업체를 찾는 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요원은 두 전자상가로 투입되었지만, 수많은 상점 중에서 어떻게 유령 업체를 찾을 수 있을까? 이로 인해 기탁은 연우에 대한 신상 파악에 소홀해져 배심원 선정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김 요원, 강 변과 하 변의 통화에 특이한 점은 없었나?”
“서로 한숨만 푹푹 쉬고 별다른 얘기는 없던데요.”
“당연하지. 지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지상의 예측대로 기탁은 요원에게 휴대폰 도청을 시켰다. 두 사람의 실명폰 통화 내용은 오로지 재판 걱정뿐이었다. 이미 그들은 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성국은 소파에 앉아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때 경비복을 입은 만복이 들어왔다.
“이리 와서 앉게나. 상태의 일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가?"
“못난 자식으로 회장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 사람아.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리야. 상태는 도진이와 죽마고우이니 내 아들이나 진배없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나?”
“아,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병신인 저를 거두어주셔서 지금껏 애들을 굶기지 않았는데요. 어디 그뿐인가요? 상태 엄마의 수술비도 전부 부담해 주셨고…”
“다 지나간 일이지. 그러고 보니 상태와 상아도 혼인할 나이가 되었구먼. 짝이 있나?”
“여러모로 부족해서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부족하긴. 아직 인연을 못 만나서 그렇지. 아이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 나는 그 애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네."
“아이고, 회장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복은 코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렸다.
“아마 술 때문에 기억이 흐릿한 것 같은데… 상태에게 이제 그만 시인하라고 해보는 게 어떨까? 만약 상태가 인정하면 좋은 직장과 집을 마련해 주려하네. 상아도 마찬가지고. 또한 검찰과 법원에 손을 쓰고 지금 변호인보다 유능한 도원 법무실 변호사를 붙여 줄 거야. 그러니 한번 설득해 보게. 상태가 워낙 효자라서 아버지 말씀을 잘 듣잖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건 작은 정성이니 받아. 상태가 나올 때까지 뒷바라지하는데 도움이 될거야.”
성국은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괜, 괜찮습니다.”
“어허! 이러면 내 손이 부끄럽잖아.”
“이 은덕은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은덕은 뭘. 도진이와 상태처럼 우리도 형제나 다름없지 않나. 허허허.”
성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